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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대군 : 세종대왕의 여섯째 아들로 어린 단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조선 전기의 비운의 왕자

by jisikRecipe 2026. 2. 23.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1457)은 세종대왕의 여섯째 아들로, 조카 단종의 복위를 위해 끝까지 싸우다 순흥 유배지에서 처형된 충절의 왕자입니다.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의 권력 찬탈에 홀로 저항하며 조선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금성대군은 누구인가 — 출생과 기본 정보

금성대군 이유(錦城大君 李瑜)는 1426년 5월 14일(음력 3월 28일) 태어나 1457년 11월 16일(음력 10월 21일) 세상을 떠난 조선 전기의 왕자이자 문신·무신·군인·정치가입니다. 그의 짧은 생애는 고작 31세에 불과하였으나, 그 삶이 조선 역사에 남긴 울림은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금성대군의 본관은 전주(全州), 휘는 유(瑜), 시호는 정민(貞愍)이며, 아버지는 세종,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 할아버지는 태종, 증조할아버지는 태조입니다.

8남 2녀 중 6남으로 위로는 문종·수양대군·안평대군·임영대군·광평대군이 있으며, 아래로는 평원대군·영응대군이 있습니다. 이처럼 금성대군은 세종 시대를 대표하는 왕자 형제들 사이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부터 왕실의 품 안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아래 표는 금성대군의 주요 기본 정보를 한눈에 정리한 것입니다.

항목 내용
이름 이유(李瑜)
봉작 금성대군(錦城大君)
시호 정민(貞愍)
출생 1426년 5월 14일(음력 3월 28일)
사망 1457년 11월 16일(음력 10월 21일)
향년 31세
아버지 세종대왕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
배우자 완산부부인 최씨(참찬 최사강의 딸)
아들 이맹한(李孟漢)
봉작 연도 1433년(세종 15년)
처형지 경상도 순흥(현 경북 영주시 순흥면)
사적지 영주 금성대군 신단(사적 제491호)

금성대군의 자(字)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며, 유년 시절에 대한 상세한 기록 역시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조선왕조실록 곳곳에는 세종이 이 아들을 유독 아끼고 사랑했음을 짐작케 하는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금성대군의 유년 시절과 성장 배경

출생과 초기 왕실 생활

1426년(세종 8년) 음력 3월 28일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양육은 태종의 후궁인 의빈 권씨가 맡았습니다. 당시 왕실에서는 적장자 외의 왕자들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양육 담당자를 지정하였는데, 금성대군의 경우 태종의 후궁이 직접 양육을 맡았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1433년(세종 15년) 1월에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3년 후인 1436년(세종 18년) 4월에 친형 광평대군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흥록대부의 품계를 받았습니다. 8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자 칭호를 받은 것은 세종의 각별한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혼인과 출계(出系)

12살 때인 1437년(세종 19년) 2월 당시 참찬인 최사강(崔士康)의 딸과 혼인하여 후에 아들 이맹한(李孟漢)을 두었습니다. 조선 시대 왕자들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혼인을 치렀으며, 금성대군도 그러한 관례를 따랐습니다.

같은 해 6월에는 세종의 명으로 태조의 8남 의안대군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으며, 이후 출궁하여 그의 사저에 의안대군의 사당을 세웠습니다. 출계(出系)란 한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다른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는 것을 뜻하는데, 금성대군은 자신의 생부 세종의 뜻에 따라 태조의 후손으로서 종묘 제사를 받드는 역할도 맡게 되었습니다.

세종의 깊은 신뢰와 사랑

금성대군은 세종으로부터 각별한 신뢰와 사랑을 받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여러 기록은 이를 뒷받침합니다.

1440년(세종 22) 6월 한때 창진(瘡疹)에 걸려 위독한 상태까지 갔는데, 세종이 내의를 보내 진료하게 하는 한편 영추문(迎秋門)을 열어두고 수시로 의원들에게 그의 병세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1444년과 1445년에는 세종이 병이 있어 금성대군의 사저에서 정양하였으며, 1445년 세종의 명을 승정원에서 전달받아 임영대군과 함께 화포(火砲) 제작의 감독을 맡아보았습니다. 이처럼 세종은 아들의 집에서 직접 병 조리를 할 만큼 금성대군을 신뢰하였고, 군사적 업무까지 맡겼습니다. 특히 화포 제작 감독은 당시 국가적으로 중요한 군비 사업이었기에, 이 임무를 부여받은 것은 금성대군이 능력을 인정받았음을 뜻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의 아들 중에서 단종과 가장 가까운 관계로 추측되며, 아버지 세종과 세자 문종이 온천행이나 강무 등으로 함께 궁궐을 비울 때 세손 단종을 금성대군의 집에서 지내도록 한 적도 몇 차례 있었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하면, 금성대군은 단순히 많은 왕자 중 한 명이 아니라, 왕실 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 세손 단종과 돈독한 관계를 맺어온 금성대군이 훗날 단종 복위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계유정난과 금성대군의 선택

계유정난(癸酉靖難)의 발생

1452년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조선 왕실은 급격히 불안정해졌습니다. 1452년에 단종이 즉위하자 형인 수양대군과 함께 즉위한 단종에 의해 사정전으로 호출되었으며, 이때 단종에게 친히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금성대군과 수양대군 모두 어린 임금을 보호하겠다는 맹세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1453년 수양대군이 정권 탈취의 야심을 가지고 왕의 보필 대신인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자, 금성대군은 형의 행위를 반대하고 조카를 보호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계유정난은 1453년(단종 1년) 10월에 수양대군이 측근들과 함께 황보인·김종서 등 당대의 중신들을 무력으로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수양대군은 이후 왕위 찬탈의 기반을 닦았으며, 1455년에는 단종으로부터 선위(禪位)를 받는 형식으로 세조가 되었습니다.

홀로 저항한 금성대군

다른 형제들이 수양대군의 편에 서거나 침묵을 선택했을 때, 금성대군은 달랐습니다.

세종의 여러 아들 중에서 다른 대군들은 세조의 편에 가담해 현실의 권세를 누렸으나, 홀로 성품이 강직하고 충성심이 많아 위로는 아버지 되는 세종과 맏형인 문종의 뜻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끝까지 보호하려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습니다.

금성대군은 타고난 천성이 강직했으며 어릴 적부터 의리와 충성심이 강해 아버지의 총애를 받고 자랐습니다. 이러한 성품은 곧 그를 수양대군의 눈 밖에 나게 만들었고, 결국 유배라는 가혹한 운명을 불러왔습니다.

첫 번째 유배 — 삭녕으로

1455년 왕의 측근을 제거하려는 수양대군에 의해 몇몇 종친과 함께 무사들과 결탁해 당여를 키운다는 죄명을 받고, 삭녕(朔寧)에 유배되었다가 광주(廣州)로 이배되었습니다.

이는 사실상 억울한 누명이었습니다. 수양대군은 모략을 세워 단종 3년인 1454년 금성대군이 반란을 꾀하였다는 이유로 왕자 신분을 박탈하고 삭령(지금의 경기도 연천)으로 귀양을 보냈습니다. 반역 혐의는 세조 정권이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즐겨 사용한 수법이었습니다.

유배의 길 — 삭녕에서 순흥까지

사육신 사건과 두 번째 유배

1456년, 성삼문·박팽년 등의 사육신들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 발각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듬해 이에 불만을 품은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중심이 되어 단종 복위(端宗復位)를 계획하다가 실패하였으며, 그 결과 여기에 가담한 자들은 대부분 처형되고,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습니다.

이때 금성대군도 삭녕에서 다시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지가 옮겨졌습니다. 사육신 사건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연루 혐의를 받아 더욱 먼 곳으로 유배지가 이전된 것입니다.

순흥(順興)은 오늘날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해당합니다. 그곳은 단종이 유배된 강원도 영월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사실 이보흠 역시 문종과 가까운 인물이며 금성대군이 유배된 순흥은 단종이 있는 강원도 영월과 멀지 않은 지역이었습니다.

위리안치(圍籬安置)의 고통

이듬해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상왕 복위운동에 실패하여 참혹하게 희생되자 그 일에 연루되었다 하여, 금성 대군은 다시 이곳 순흥으로 유배,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습니다.

위리안치란 유배자의 거처 주위에 가시나무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가장 가혹한 형태의 유배입니다. 외부와의 접촉이 철저히 차단되고, 행동의 자유가 완전히 박탈된 상태입니다. 이 극한의 상황에서도 금성대군은 단종 복위의 의지를 꺾지 않았습니다.

순흥에서의 고독과 결의

유배지 순흥에서의 금성대군은 표면적으로는 고립된 죄인이었지만, 내면으로는 여전히 충절의 왕자였습니다. 당시 순흥은 단종을 지지하는 민심이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이었으며, 이러한 분위기가 금성대군의 결의를 더욱 굳건하게 해주었을 것입니다.

순흥에서의 단종 복위 운동과 최후

이보흠과의 연대

순흥에 안치된 뒤,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모의해 고을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도내의 사족(士族)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일으켜 단종 복위를 계획하였습니다.

이보흠은 순흥부사로 문종 때부터 왕실과 인연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사민(士民)들이 동조했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상당한 규모를 가진 봉기 계획이었을 가능성이 있을 듯하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합니다. 단순한 소수 모반이 아니라, 지역의 군사·행정력을 동원하는 상당한 규모의 거사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격문은 경상도 일대의 사족(士族)들에게까지 돌려졌습니다. 이는 금성대군이 단순히 감정적 충동이 아닌, 치밀한 계획 아래 단종 복위를 추진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관노의 고발로 좌절된 거사

그러나 거사는 실행 직전 실패로 돌아갑니다. 거사 전에 관노의 고발로 실패로 돌아가 반역죄로 처형당하였습니다.

거사 전인 6월 말 관노 이동(李同)의 고발로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에 세조는 순흥에 소윤 윤자, 예천에 우보덕 김지경, 안동에 진무 권감을 각각 보내어 연루된 자들을 국문하도록 했습니다.

세조실록에는 이보흠이 스스로 고변(告變)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만, 금성대군 사건 전후의 기록은 흐름이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많고 이보흠도 유배당했다가 사망합니다. 진실이 어떠하든, 거사는 비밀이 누설되면서 완전히 좌절되었습니다.

금성대군의 처형

1457년 9월 10일 사간원에서 금성대군에 대한 처벌을 요청하였고, 신숙주·정인지 등은 노산군도 함께 사사하기를 요청하였습니다. 1457년 10월에는 승정원·사헌부·의정부·육조·충훈부뿐만 아니라 임영대군·양녕대군·효령대군 등도 노산군과 금성대군의 처벌을 요청하였습니다.

형제들까지 나서서 처형을 요청했다는 사실은 당시 세조 정권의 공포 분위기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친형제의 처형을 청원해야 했던 비극이었습니다.

이에 세조는 1457년 10월 21일 금성대군을 사사하였으며, 이후 종친록과 유부록에서 노산군·금성대군과 그 자손들을 삭적하고, 종친으로서 지위를 박탈하였습니다.

금성대군이 처형당한 소식은 영월에 유배 중이던 단종에게도 전해졌습니다. 1457년 11월 16일 작은아버지 금성대군의 사사와 장인 송현수(宋玹壽)의 교형이 결정되자 단종은 나중에 영월에서 이 소식을 듣고 충격에 자살했다고 전해지나, 실질적으로는 단종의 사사 역시 이때 최종 결정된 것으로 보입니다.

금성대군의 죽음과 단종의 죽음은 사실상 같은 시기에 벌어진 비극이었습니다. 삼촌과 조카가 차례로 세상을 떠나면서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던 세력은 완전히 제거되었습니다.

또한 금성대군 사건의 여파로 순흥도호부는 혁파되는 비운을 맞았습니다.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순흥도호부는 혁파되어 인근 영천군과 풍기군에 분속되었습니다. 지역 전체가 연좌되어 그 행정 단위 자체가 없어진 것입니다.

금성대군의 복권과 후대의 평가

명예 회복의 과정

금성대군의 명예가 회복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세조 집권 시절에는 반역자로 낙인찍혀 왕실 족보에서도 지워졌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의 평가는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숙종 9년(1683)에 순흥은 명예가 회복되고, 이어 숙종 45년(1719) 고을 사람 이기륭이 부사 이명희에게 알려 단소(壇所)를 설치하게 되었습니다. 약 200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순흥의 명예가 회복되고, 금성대군을 추모하는 공간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1739년(영조 15) 금성대군에게 '정민(貞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1791년(정조 15)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할 때에 육종영(六宗英) — 신주배향을 내린 안평대군 등 6인의 종친 — 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정민(貞愍)'이라는 시호는 "곧고 바름[貞]"과 "슬프고 애처로움[愍]"이라는 두 글자로 이루어진 것으로, 금성대군의 강직한 성품과 비극적 운명을 동시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영주 금성대군 신단(榮州 錦城大君 神壇)

금성대군 신단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영조 18년(1742) 경상감사 심성희(沈聖熙)의 소청에 의하였으며, 단소를 정비하고 중앙에 금성대군 위(位), 오른쪽 편에 부사 이보흠 위(位), 왼편에 무명 의사 위(位)를 모시고 순의비(殉義碑)를 세웠습니다.

영주 금성대군 신단은 현재 사적 제49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금성대군과 이보흠, 그리고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스러진 수많은 의사(義士)들을 함께 기리는 공간입니다. 이름 모를 의사들의 위패까지 함께 모셨다는 점은 당시 거사에 얼마나 많은 민초들이 함께했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역사적 의의

금성대군이 역사에서 갖는 의의는 단순한 충절의 상징을 넘어섭니다. 그는 당시 세조 정권이 구축한 강력한 권력 앞에서도 의(義)를 굽히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사육신처럼 직접 관료로서 복위 운동에 나선 것과는 달리, 왕실 종친이라는 신분으로 유배지에서도 꺾이지 않는 저항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삶은 후대 조선 사회에 큰 교훈을 남겼습니다. 권세에 굴복하지 않는 강직함, 맹세를 끝까지 지키려는 의지, 그리고 비록 실패하더라도 옳다고 믿는 길을 걷는 용기가 금성대군이라는 인물에게 집약되어 있습니다.

금성대군 신앙 — 신격화된 충절의 왕자

무속 신앙 속의 금성대군

금성대군은 사후에 독특한 방식으로 민중의 기억에 남았습니다. 사후에는 유배당한 영월에서 태백산의 산신령으로 모셔진 단종과 마찬가지로, 유배당한 영주 순흥에서 소백산의 산신령으로 신격화되었습니다.

당대의 순흥이 단종복위운동을 전개할 정도로 단종에 대한 지지도가 강했던 것과 무속 특유의 인격신 문화가 이같은 금성대군 신앙을 만들어냈다고 여겨집니다. 억울하게 죽은 인물을 신으로 모시는 것은 한국 무속 신앙의 오랜 전통이며, 금성대군은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금성당(錦城堂)과 신단의 분포

무속에서 신격화된 금성대군을 모시는 신전으로는 서울의 금성당, 고치령 신령각, 영주 금성대군 신단 등이 있는데, 현재 금성당은 샤머니즘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서울의 금성당은 오랜 세월 동안 금성대군을 모시는 무속 공간으로 기능해왔습니다. 궁녀와 내시들도 이 금성당을 자주 찾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과거 금성당에 굿을 다녔던 서울굿 큰만신 이상순은 옛날 궁에서 상을 입으면 상궁 나인들이 금성당에서 밤새도록 굿을 하고 이튿날 새남을 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청주 금성대군 제단

청주 금성대군 제단(淸州 錦城大君 祭壇)은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대신리 산 49번지 절동, 완산부부인 최씨 묘소 우측에 있으며, 2005년 8월 12일 충청북도의 문화재자료 제4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처럼 금성대군 관련 유적은 경상북도 영주뿐만 아니라 충청북도 청주에도 남아 있어, 그의 영향이 전국적으로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금성대군 신단의 경우 유교사회인 조선 시대에 조선의 왕족을 인신(人神)으로 모신 굉장히 드문 사례로서 높은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받습니다.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에서 왕족이 무속의 신으로 모셔지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이는 금성대군이 민중에게 얼마나 강렬한 인상과 감동을 남겼는지를 반증합니다.

마무리 — 비운의 왕자가 남긴 유산

금성대군 이유(李瑜)는 겨우 31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단순히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강직한 성품으로 권력 앞에 굴복하지 않고, 어린 조카 단종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그의 의지는 역사 속에서 영원히 빛납니다.

계유정난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부분의 왕자들이 현실과 타협했을 때, 금성대군은 홀로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유배지에서도, 극한의 위리안치 속에서도 그는 의로운 뜻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를 더욱 위대한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영조 때 내려진 '정민(貞愍)'이라는 시호, 정조 때 육종영의 한 사람으로 선정된 것, 그리고 민중 속에서 소백산의 신령으로 신격화된 것 — 이 모든 것이 금성대군이라는 인물의 진정한 가치를 말해줍니다. 죽어서도 오래도록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쉬는 존재, 그것이 바로 금성대군의 진정한 유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