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금와왕 : 동부여의 제2대 국왕으로 신화적 탄생과 역사적 업적을 남긴 고구려 건국신화의 핵심인물

by jisikRecipe 2025. 11. 5.

동부여의 제2대 국왕인 금와왕은 한국 고대사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부여의 건국 설화와 고구려의 건국 설화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며, 고구려 시조 주몽의 양아버지로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금와왕의 신화적 탄생과 이름의 의미

금와왕의 탄생은 매우 신비로운 이야기로 전해집니다. 부여왕 해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후사를 구하였습니다. 어느 날 해부루가 탄 말이 곤연(鯤淵)이라는 못가에 이르러 큰 바위를 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해부루가 사람을 시켜 그 바위를 치워보니 금빛이 나는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해부루는 이를 하늘이 내려준 아들로 여겨 금와(金蛙)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금와라는 이름은 '금빛이 나는 개구리'라는 의미로, 고대 신화에서 개구리는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이는 그의 통치가 백성들에게 풍요로움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금와는 장성하여 태자가 되었고, 해부루의 뒤를 이어 기원전 60년경부터 기원전 24년까지 약 36년간 동부여의 왕으로 재위하였습니다. 그의 성은 해(解)씨로, 해부루왕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았습니다.

동부여의 건국과 가섭원 천도

동부여의 건국 과정에서 금와왕의 아버지 해부루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해부루 때 재상 아란불(阿蘭弗)이 꿈에서 천제(天帝)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천제는 "앞으로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려고 하니 너는 다른 곳으로 가거라. 동해 바닷가에 가섭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니 도읍을 세울 만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해부루왕은 가섭원(迦葉原)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동부여라고 하였습니다. 가섭원은 현재의 길림성 북부 부여현 지역으로 추정되며, 이곳에서 동부여는 서기 494년까지 존속하였습니다. 금와왕은 이러한 동부여를 계승받아 안정적으로 통치하였습니다.

유화부인과의 만남 및 주몽 탄생

금와왕의 가장 유명한 일화는 유화부인과의 만남입니다. 금와왕은 태백산(太白山) 남쪽의 우발수(優渤水)에서 사냥을 하다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났습니다. 유화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의 일로 아버지 하백에게 쫓겨나 그곳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금와왕은 유화의 딱한 사정을 듣고 그녀를 궁으로 데려왔습니다. 유화를 별실에 가둔 후, 햇빛이 유화의 몸을 따라다니며 비추었고, 이로 인해 유화는 임신하여 큰 알 하나를 낳았습니다. 금와왕은 이를 불길하게 여겨 알을 버리게 하였으나, 개·돼지·소·말 등의 동물들이 알을 밟지 않고 도리어 보호하며, 새들이 날개로 덮어주는 등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금와왕은 이 알이 신비로운 존재임을 깨닫고 유화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 알에서 나온 아이가 바로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입니다. 주몽은 어릴 때부터 활을 잘 쏘아 부여 사람들이 활 잘 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인 '주몽'이라고 불렸습니다.

왕자들과의 갈등 및 주몽의 성장

금와왕에게는 대소(帶素)를 비롯하여 모두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몽의 뛰어난 재능과 용맹함을 시기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특히 맏아들 대소는 금와왕에게 "주몽은 신통하고 용맹한 장사이며 눈초리가 비상하니, 만일 일찍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주몽을 제거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금와왕은 해모수의 아들인 주몽을 죽이지 않고 대신 마구간에서 말을 기르는 일을 맡겼습니다. 이는 주몽의 재능을 시험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주몽은 이 임무를 통해 명마를 구별하는 뛰어난 안목을 보였는데, 준마는 일부러 적게 먹여 파리하게 하고 노마는 잘 먹여 살찌게 하여 금와왕이 살찐 말을 선택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주몽의 부여 탈출과 고구려 건국

주몽이 성인이 되자 위기감을 느낀 대소와 다른 왕자들의 위협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들은 금와왕 몰래 주몽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고, 이를 눈치챈 유화부인은 아들에게 부여를 떠날 것을 권하였습니다. 유화부인은 주몽에게 "너의 재능과 지략이라면 어디든 가서 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주저하다가 욕을 당하기보다 차라리 멀리 가서 큰 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하였습니다.

주몽은 어머니의 권유를 받아들여 기원전 37년 친구인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동부여를 탈출하였습니다. 이때 주몽은 미리 준비한 명마를 타고 엄리대수(현재의 압록강)를 건너 졸본에 도착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습니다. 금와왕과 대소는 추격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미 늦었습니다.

유화부인의 죽음과 금와왕의 관용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지 14년 후인 기원전 24년 8월, 유화부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때 금와왕은 놀라운 관용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유화부인을 태후(太后)의 예로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무덤을 크게 만들어 주고 사당까지 세워주었습니다. 또한 주몽이 보낸 고구려 호위군 수만 명이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는 금와왕이 개인적으로는 주몽에 대해 적대감을 갖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주몽 또한 금와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감사의 선물을 전하며 예를 지켰습니다. 이러한 상호 존중은 당시 동북아시아 지역 정치문화의 수준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금와왕의 죽음과 왕위 계승

기원전 24년 유화부인이 죽은 얼마 후, 금와왕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맏아들 대소가 동부여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대소왕은 아버지와는 달리 고구려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고, 결국 서기 22년 2월 고구려 대무신왕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습니다.

대소왕의 죽음 후 동부여는 분열되었습니다. 대소왕의 막내 동생이었던 갈사왕은 나라가 망할 것을 예감하고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갈사수 가에 갈사부여를 세웠습니다. 또한 대소왕의 종제(사촌동생)는 1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하였습니다.

금와왕의 역사적 의미와 평가

금와왕은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그는 고구려 건국신화의 핵심 인물로서 주몽의 양아버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둘째, 동부여의 안정적인 통치자로서 약 36년간 왕권을 유지하며 나라를 발전시켰습니다. 셋째, 그의 탄생 설화는 고대 왕권의 신성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금와왕의 탄생 설화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곤연의 바위 아래에서 발견되었다는 설정입니다. 이는 고대인들의 지생관(地生觀), 즉 땅에서 생명이 솟아난다는 관념을 반영합니다. 곤연이라는 지명은 동부여가 멸망한 후 고구려가 관리하는 졸본의 땅에 있었으며, 금와의 일족들은 곤연의 호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개구리라는 동물이 갖는 상징성도 중요합니다. 개구리는 고대 신화에서 다산과 풍요, 생명력을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금와왕의 이름 자체가 그의 통치가 백성들에게 풍요로움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금와왕과 주몽의 복잡한 관계

금와왕과 주몽의 관계는 단순히 양아버지와 양아들의 관계를 넘어서 복잡한 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금와왕은 주몽을 보호하면서도 완전히 신뢰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주몽이 금와왕의 친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니라, 부여 내부의 정치적 역학관계 때문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금와왕 자신도 해부루왕의 친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바위 아래에서 발견된 양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여의 왕위를 계승받은 것처럼, 주몽 또한 출중한 능력으로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금와왕의 친아들들, 특히 대소의 강력한 반발과 신하들의 견제로 인해 이는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주몽과 금와가 거의 또래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주몽이 기원전 79년경, 금와가 기원전 77년경에 태어났다면 주몽이 금와보다 두 살 정도 많았을 것이라는 추정입니다. 이 경우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단순한 세대갈등이 아니라 동년배 경쟁자들 간의 권력투쟁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금와왕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

금와왕의 후손들은 한반도 북부 지역의 역사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아들 대소왕은 동부여의 마지막 왕이 되어 고구려와 치열한 대립을 벌였습니다. 대소왕은 기원전 6년, 서기 9년, 13년, 21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습니다.

특히 서기 20년에는 고구려에 몸통은 둘인데 머리는 하나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며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라고 위협하였으나, 대무신왕의 기지 넘치는 답변에 오히려 후회하였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결국 서기 22년 대무신왕의 침공을 받아 전사하면서 동부여는 멸망하게 됩니다.

금와왕의 막내아들 갈사왕은 형 대소왕의 죽음을 보고 나라가 망할 것을 예감하고 미리 탈출하여 갈사부여를 건국하였습니다. 갈사부여는 갈사수 가에 도읍을 정하고 약 46년간 존속하다가 서기 68년 8월 고구려에 투항하면서 멸망하였습니다. 갈사왕의 손녀는 고구려 대무신왕의 차비(次妃)가 되어 호동을 낳기도 하였습니다.

금와왕과 동부여의 문화적 특징

금와왕 시대의 동부여는 독특한 문화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우선 말(馬) 문화가 매우 발달하였습니다. 금개구리 설화에서 해부루왕의 말이 바위 앞에서 눈물을 흘려 금와왕의 탄생을 알렸듯이, 말은 신성한 동물이자 하늘의 사신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주몽이 마구간에서 일할 때 명마를 구별하는 능력을 보인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동부여는 천손사상(天孫思想)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주몽이 강을 건널 때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자"라고 외친 것은 이러한 천손의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는 고구려인들이 하늘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제사 문화도 중요한 특징 중 하나였습니다. 해부루왕이 후사를 얻기 위해 산천에 제사를 지낸 것, 금와왕이 유화부인을 태후의 예로 장례 지낸 것 등은 동부여의 발달된 제의 문화를 보여줍니다.

사료상의 금와왕과 역사적 검증

금와왕에 대한 기록은 여러 사료에 남아 있어 그의 역사적 실재성을 뒷받침합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1 시조동명성왕조와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동부여 고구려조에 상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에서도 금와왕을 주몽 신화의 핵심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중국의 『구삼국사』에도 관련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금와왕과 관련된 이야기가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당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실제로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고고학적으로도 길림성 부여현 일대에서 발견되는 고분군과 유물들은 동부여의 존재와 금와왕 시대의 문화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자료들입니다. 특히 이 지역에서 출토되는 금제 장신구들은 '금와'라는 이름의 상징적 의미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현대적 해석과 재평가

현대 역사학계에서 금와왕은 다양한 관점에서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그를 단순한 신화적 인물이 아니라 기원전 1세기 경 동북아시아의 복잡한 정치상황 속에서 실제로 동부여라는 독립국가를 운영한 정치지도자로 평가합니다.

특히 그의 정치적 관용은 높이 평가받습니다.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수 있는 주몽을 죽이지 않고 보호한 점, 주몽이 떠난 후에도 그의 어머니 유화를 극진히 모신 점 등은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정치적 아량이었습니다.

반면 일부에서는 금와왕이 왕실 내부의 갈등을 제대로 조율하지 못해 결국 주몽의 탈출을 초래했다는 비판적 시각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당시 고대 국가의 정치구조가 왕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복잡한 권력관계를 내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문화콘텐츠 속의 금와왕

금와왕은 현대 문화콘텐츠에서도 중요한 소재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 방영된 MBC 드라마 『주몽』에서는 배우 전광렬이 금와왕 역할을 맡아 깊이 있는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이 드라마를 통해 일반 대중들에게 금와왕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창작 오페라 『주몽』등 다양한 공연예술 작품에서도 금와왕은 중요한 인물로 등장합니다. 이러한 문화콘텐츠들은 고대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이고 금와왕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금와왕은 신화와 역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한국 고대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개인의 전기를 넘어서 고대 동북아시아 지역의 정치·사회·문화사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열쇠가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고고학적 발굴과 사료 연구를 통해 금와왕과 동부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더욱 깊어질 것으로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