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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을동아버지 : 김두한,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자 협객 출신 정치인

by jisikRecipe 2025. 11. 20.

김을동 아버지는 바로 김두한입니다. 김두한은 1918년 6월 23일 태어나 1972년 11월 21일 사망한 인물로, 독립운동가 백야 김좌진 장군의 서자이자 일제강점기 말기의 조직폭력배 출신에서 대한민국의 제3대·제6대 국회의원을 지낸 전직 정치인입니다. 그의 딸이 바로 배우 출신 국회의원인 김을동이며, 손자는 배우 송일국, 증손자는 삼둥이로 유명한 송대한·송민국·송만세입니다.

김두한의 일생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 했습니다. 어린 시절 고아처럼 자라며 조직폭력배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광복 후에는 우익 정치깡패로 활동하다가 국회의원이 되어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비판했습니다. 특히 1966년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에 항의하며 국회에서 오물을 투척한 사건은 그의 대표적인 행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애와 청년시절

김좌진 장군의 서자로 태어나다

김두한은 1918년 6월 23일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과 기생 김계월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김좌진은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운동의 영웅이었으나, 김두한이 12세 때인 1930년 1월 24일 만주 하얼빈에서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했습니다. 김좌진 장군의 정실 부인은 오숙근으로, 김두한은 서자 신분이었기에 정식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성장했습니다.

김두한의 출생 배경은 그의 인생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독립운동가의 아들이라는 자부심과 동시에 서자로서의 콤플렉스, 그리고 부친의 부재로 인한 정서적 결핍이 그의 성격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고아나 다름없는 성장 과정

김두한은 교동공립보통학교에 잠시 다녔으나, 조선총독부에 의해 김좌진 장군의 가족으로 불령선인으로 지목되는 한편 집안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제대로 학교를 다니지 못했습니다. 1930년 10세 때 혼자 경성에 왔으나 거지들에게 잡혀 수표교 아래에서 살아가다가 원씨 성의 한 노인을 만나 17세까지 성장했습니다.

원 노인은 김두한에게 "왜놈의 공부는 할 필요가 없다. 곧 독립하니 그때 공부하라"라고 말하며 학교 대신 운동에만 전념하도록 했습니다. 이 시기 김두한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거리에서 생존법을 익히며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기르게 됩니다. 원 노인마저 일제의 고문으로 사망한 후, 김두한은 완전히 홀로 서야 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조직폭력배의 우두머리로 등극

원 노인이 죽은 뒤 김두한은 서울에서 조직폭력배들을 눕히며 1935년 나이 18세에 우미관을 중심으로 일약 경성의 조직폭력배 리더로 등극했습니다. 당시 그에게 붙은 별명은 '잇봉'으로, 일본어로 '한 방'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그가 상대를 한 방에 쓰러뜨린다는 의미로, 그의 뛰어난 싸움 실력을 상징했습니다.

김두한은 개인적으로 1930년 후반 배우 김승호를 동양극장 극단에 소개하고, 곤경에 처한 권투선수 정복수와 레슬링 선수 황병관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태평양 전쟁 이후 1942년 조선총독부로부터 강제 징용이 요구되었을 때, 김두한은 조선총독부와 협상하여 경성특별지원청년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재직하며 징용 대체 근로활동을 했습니다.

독립운동과 우익활동

좌익에서 우익으로의 전향

1945년 해방 이후 김두한은 건국준비위원회 등에 참여하여 일본군 무기고를 점령하거나 치안에 힘을 기울이며 활약했습니다. 이후 죽마고우였던 프롤레타리아트 공산주의자 정진영, 만담가 신불출, 박헌영과의 인연으로 조선공산당의 전위대장을 역임했습니다. 남로당 총책이었던 박갑동에 의하면 김두한이 전위대장으로 역임한 이후 민족진영에서는 조선공산당에 대해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임시정부 계열 비밀결사인 백의사, 이규갑, 장덕수 등으로부터 아버지 김좌진의 죽음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된 김두한은 조선공산당을 탈퇴하고 우익으로 전향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 것이 그의 정치적 노선을 완전히 바꾼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한민청 실질적 지도자 활동

김두한은 대한민청의 실질적 지도자로서 반탁운동 등 좌우대립에서 우익의 선봉장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는 산정호수 김일성 별장습격, 박헌영 납치미수, 국군준비대 습격, 학병동맹 습격, 전평 본부습격, 심영·신불출 습격, 9월 총파업 등에 활약했습니다. 또한 김원봉 습격, 좌우합작 방해 등에도 관여했다고 후일 회고록에서 밝혔습니다.

김두한은 청년단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훗날 반민특위의 체포대상이었던 박흥식 등 친일파 자본가들 집에 습격하기도 했으나, 1원도 사사로운 곳에 쓰지 않았다는 근거로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자신의 집을 저당과 이승만의 친필 휘호를 보여주며 영수증을 썼다고 회고록에서 밝혔습니다.

미군정의 사형 선고와 석방

김두한은 대한민청의 실질적 지도자이자 우익의 선봉장으로서 활약하였으며, 반공투쟁 과정에서 살상행위를 서슴지 않아 미군정청에 의해 사형언도를 받고 오키나와 미군부대에 수감되었습니다. 사형집행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맞아 사건이 미군정에서 대한민국 검찰로 이관되면서 그는 집행의 위기에서 벗어나 석방되었습니다.

석방 이후 김두한은 대한청년단의 감찰국장 겸 건설국장을 역임하였으며,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 최고위원, 대한학도의용군 참모장 등을 역임하면서 반공·노동운동을 계속했습니다. 한국전쟁에도 대한학도의용군 등 전선에 참전했습니다.

정치활동과 국회의원

제3대 국회의원 당선과 활동

김두한은 1954년 5월 20일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종로구 을구 4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법조인 한근조와의 근소한 차이로 승리, 당선되었습니다. 36세의 나이로 국회에 입성한 김두한은 처음부터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는 국회의원이 된 직후부터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1954년 11월 이승만 정부의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 투표를 던진 김두한은 자유당에서 제명조치되어 탈당당하였고, 이후 무소속으로 활동했습니다. 1956년 1월 진보당추진위원회에 조직부로 참여했으나 부흥주택대지 2중 매매 혐의로 시경에 내사받고 진보당을 탈퇴했고, 곧 노농당으로 옮겼습니다.

이승만 정권 비판과 시련

김두한은 계속해서 이승만 정부를 비판했고, 그 일로 1956년 10월 5일 이승만을 민족반역자라고 비판한 국가원수모독죄로 의원징계처분을 받았습니다. 1957년 11월에는 "국회의원을 몰라보냐"며 김만기 서울사세청장의 얼굴과 가슴을 구타해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기소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자잘한 폭행 사건과 말실수 등으로 구민들의 신뢰를 잃어 김두한은 대한민국 제4대 국회 종로구에서 노농당 후보, 대한민국 제5대 국회 충남 홍성에서 무소속으로 연이어 낙선했습니다. 7년간의 정치 공백기를 거친 후, 그는 다시 정치 무대에 복귀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제6대 국회의원 재선

김두한은 1964년 8월 한일협정에 반대하며 민중당 의원들이 사퇴해 발생한 서울 용산구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정치이념을 계승한 한독당 소속으로 국회에 다시 진출한 것입니다. 7년간 정치공백을 깨고 입성한 그는 국회 첫 연설부터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을 공격했습니다.

김두한은 1966년 1월 8일 한독당 당원 10여 명이 반정부 폭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사제폭탄까지 만들어 교외에서 실험했다는 중앙정보부의 발표로 구속되고 모진 고문을 가했으나 20일 만에 풀려났습니다. 이후 그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계속 비판하며 야당 의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국회 오물투척 사건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의 배경

1966년, 삼성그룹의 계열사인 한국비료주식회사가 건설 자재라고 속여 일본에서 사카린 원료를 밀수한 사실이 들통났습니다. 재벌이 밀수를 했다는 사실에 사회가 떠들썩했고, 정부와 대기업의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당시 "밀수를 제안한 것도 박정희 대통령"이며 "밀수의 목적도 정치자금 마련을 위해서"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습니다.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에 관한 대정부 질의가 진행 중이던 국회에서, 김두한은 재벌과 정권의 유착을 규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시 김두한은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이라는 조작 사건에 휘말렸다가 오물 투척 직전에 겨우 무죄 판결을 받았던 상태였고,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독립당은 완전히 와해되어 무소속인 상태였습니다.

국회 본회의장 오물 투척

1966년 9월 22일, 국회 질의 마지막 날 김두한은 흰 보자기에 싼 통을 들고 국회 본회의에 들어왔습니다. 정일권 국무총리, 장기영 경제부총리, 민복기 법무장관, 김정렬 상공장관을 앞에 두고 발언대에 선 김두한은 장광설을 풀다가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이병철이 밀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가 범죄를 저지를 만한 환경을 조성해 줬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를 파괴하고 재벌과 유착하는 부정한 역사를 되풀이하는 현 정권을 응징하고자 한다. 국민의 재산을 도둑질하고 이를 합리화시키는 당신들은 총리나 내각이 아니고 범죄 피고인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선 너희들이 밀수한 사카린 맛을 봐라".

그리고 파고다공원에서 가져온 오물을 국무위원석을 향해 투척했습니다. 회의는 즉시 중단되었고, 이효상 당시 국회의장의 징계 요구에 따라 국회법제사법위원회는 김두한의 제명을 결의했습니다.

구속과 석방 그리고 후유증

김두한은 국회의원직을 잃고 국회의장 모욕, 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며 그는 "이보쇼, 내가 똥물을 던진 것은 말이요, 장관들 개개인한테 던진 것이 아니라 헌정을 무시하면서 밀수사건을 비호하는 제3공화국 정권에 던진 거란 말이요"라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김두한을 데려다 어떻게든 자백을 받으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받았고, 모진 고문을 가했습니다. 국회의장을 역임한 이만섭은 그의 자서전에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똥물투척은 김종필의 지령이라고 보고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두 차례의 고문은 김두한의 몸을 병들게 했습니다.

가족관계와 사생활

정식 부인 이재희와의 결혼

김두한과 이재희는 1944년 결혼했습니다. 당시 김두한은 27세, 이재희는 21세였습니다. 이재희는 전주이씨 효령대군 18대손이며, 중매결혼이었습니다. 김좌진 장군의 부인이자 김두한의 어머니인 박계숙 여사의 중매로 만났고, 안동 김씨 후손임에 자부심을 갖고 있던 김두한은 결혼할 상대가 가문 있는 집안의 처자라는 사실에 얼굴도 모른 채 부모의 뜻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1945년 10월 10일(음력 9월 5일) 이재희는 딸 김을동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말이 부부지 김두한은 집보다 밖에 머문 경우가 훨씬 많았습니다. 김을동은 "나는 8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아버지 얼굴을 볼 수 있었다"며 "아버지는 명절이나 어머니 생신 때나 집에 들어오시는 철저한 바깥양반이었다. 그래서 정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여러 여인들과의 관계

김두한에게는 본처와 2명의 소실을 포함해 4명의 여인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둘째 부인은 김부미로, 김두한과의 사이에 아들 1명과 딸 1명이 있습니다. 셋째 부인은 김순옥으로, 김두한은 1972년 임종 직전 조일환 등 자신의 부하들에게 "처와 범상이를 잘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김을동은 방송에서 "아버지 주변에 있었던 많은 여자들 덕분에 이복동생도 있다"고 숨겨둔 가족사를 털어놨습니다. 김두한의 세 여인은 1972년 그가 임종했을 때 처음으로 함께 모였고, 이재희는 이후에도 두 부인과 그들의 자식들을 김두한의 분신으로 여기고 김두한이 베풀지 못한 사랑을 대신해 전했다고 합니다.

가정에 무관심한 아버지

김두한은 몇 년간 집에 안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재희는 안동 김씨의 며느리로 4대 봉사까지 지냈지만, 가족 생계는 이재희의 삯바느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을동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내조하기 위해 할머니와 어머니는 대대로 삯바느질을 대물림하며 살았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전했습니다.

전기가 없어서 숯으로 생활했는데 이재희는 전기 대신 사용했던 숯의 연기를 30여 년 정도 맡다 보니 만성 가스 중독으로 마비가 되어 결국 1986년 8월 4일 사망했습니다. 김을동은 "밖으로만 나돈 아버지 덕분에 숱한 고생을 하다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오다가도 아버지 생각만 하면 나오던 눈물도 들어간다"고 옛 시절을 회상했습니다.

사망과 평가

1972년 11월 갑작스러운 사망

김두한은 1972년 11월 19일 서울 서대문 고려병원에 입원해 20일 퇴원했고, 이튿날인 21일 오전 9시 5분에 사망했습니다. 당시 그는 서울 C호텔로 사람을 만나러 가는 도중에 쓰러진 것으로 전해집니다. '누군가'에 의해 병원에 옮겨졌으나 그는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김두한이 '길거리에서 비명횡사했다'는 소식은 당시에도 믿어지지 않는 뉴스였습니다. 김두한의 장녀 김을동은 "아버지를 병원으로 옮긴 사람이 끝내 나타나지 않아 아버지가 숨진 과정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면서 "그렇다고 아버지가 타살됐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밝혔습니다.

사망 원인을 둘러싼 의혹

김두한의 공식적인 사망 원인은 뇌출혈입니다. 사체에는 타박흔적이 없었기 때문에 '뇌졸중'이라는 병원 발표에 이의를 다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후에도 '김두한은 타살당했다'는 기사가 보도될 정도로 그의 죽음은 미스터리로 남아있습니다.

김두한과 동갑친구이자 같은 안동 김씨 핏줄로서 주먹세계를 함께 주름잡은 김동회는 최근에야 '김두한 린치사건'에 대해 입을 열었습니다. 김두한이 숨지기 4-5개월 전 까마득한 후배로부터 상상할 수 없는 하극상을 당해 마음의 상처를 입고 뇌출혈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김두한의 동지들은 이 인물이 누군가에게 매수당해 김두한을 의도적으로 괴롭혔다고 보고 있으며,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배후로 지목합니다.

화병과 후유증이 초래한 죽음

김두한의 죽음은 '국회 똥물투척사건' 이후 박정희 정권의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한마디로 화병으로 숨졌다는 것입니다. 두 차례의 고문은 김두한을 병들게 했고, 이는 그의 건강을 크게 악화시켰습니다.

김을동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눈물이 나야 하는데, 눈물이 쏙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며 "반면 어머니 생각만 하면 가슴이 저며온다"고 밝혔습니다. 1972년 11월 21일, 김두한은 오랜 지병이었던 고혈압으로 쓰러져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55세였고, 박정희 정권의 독재가 또 한 번의 정권 연장을 위해 유신헌법을 제정한 음울한 시기였습니다.

후손과 유산

딸 김을동과 손자 송일국

김두한의 딸 김을동은 1945년 10월 10일 태어나 배우와 성우로 활동하다가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1995년 서울시의회 의원을 시작으로 제18대·19대 국회의원을 역임했습니다. 김을동은 송정웅과 결혼하여 아들 송일국과 딸 송송이를 두었습니다.

송일국은 1971년 10월 1일 서울에서 태어나 현재 배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2000년대 드라마 '애정의 조건', '해신', '주몽', '바람의 나라' 등에 출연하며 '국민 배우'로 통했습니다. 특히 고구려 시조 주몽을 다룬 드라마 '주몽'에서 주인공으로 출연하며 아시아 이슬람권 국가들에서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삼둥이 증손자들의 탄생

송일국은 판사로 재직 중인 정승연과 결혼하여 2012년 세쌍둥이 아들을 얻었습니다. 김을동 국회의원은 태어날 손자들의 이름을 '송대한', '송민국', '송만세'로 정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름 순서대로 첫째 대한, 둘째 민국, 막내 만세로, 세 명의 다둥이를 통틀어서 삼둥이라고 부릅니다.

송일국은 삼둥이와 함께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하며 국민적 인기를 끌었고, 세 아이의 순수하고 귀여운 모습은 시청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김을동 최고위원은 의원들과 인사를 나눌 때 자신의 손자 이름을 외치며 "제가 '대한민국'하면 여러분이 '만세'라고 답해달라"고 말할 정도로 손자 사랑이 남달랐습니다.

한국 현대사에 남긴 족적

김두한은 대한민국 인명사전에 4대가 모두 등록된 집안의 일원입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본인, 아들까지 모두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 나왔는데 이것도 진기록입니다. 1990년대에 개봉한 영화 '장군의 아들'이나 최고 시청률 57%까지 찍었던 124부작의 대하 드라마 '야인시대'를 통해 김두한의 생애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습니다.

김두한이 독립운동이나 민주화 투쟁을 한 적은 없지만, 종종 '의로운 협객'이라며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까닭은 그의 시대가 불의했기 때문입니다. 하필 갈등을 빚은 대상이 조선총독부나 이승만, 박정희 정권이었기에 인기를 누린 것입니다. 1999년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여러 교육 사업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김을동이 이사장을 맡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김두한 주요 이력 요약표

구분 내용
출생 1918년 6월 23일, 서울
사망 1972년 11월 21일 (향년 54세)
부친 김좌진 (독립운동가, 청산리 전투 영웅)
모친 김계월 (기생)
배우자 이재희 (정실), 김부미, 김순옥 외
자녀 김을동 (딸), 김경민 (아들), 김영채 (딸) 외
주요 경력 조직폭력배 (1935-1945) 대한민청 감찰부장 (1945-1948) 제3대 국회의원 (1954-1958) 제6대 국회의원 (1965-1966)
대표 사건 국회 오물투척 사건 (1966년 9월 22일)
사망 원인 뇌출혈 (고혈압 합병증)

김두한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낸 인물입니다.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나 조직폭력배로 성장했고, 우익 정치깡패를 거쳐 국회의원이 되어 독재 정권을 비판했습니다. 그의 삶은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불의에 맞서 싸운 협객의 이미지로 대중의 기억 속에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