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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지처참과 거열형의 차이 : 사형제도 역사에서 가장 혼동되는 두 극형에 대한 명확한 구분

by jisikRecipe 2025. 10. 27.

전근대 사형제도에서 가장 잔혹한 형벌로 꼽히는 능지처참과 거열형은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같은 형벌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이 두 형벌은 비록 모두 죄인의 신체를 분리하여 처형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실제로는 집행 방법과 기원에서 명백한 차이를 보이는 서로 다른 형벌입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사극의 영향으로 거열형을 능지처참으로 잘못 인식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능지처참의 정의와 역사적 기원

능지처참(陵遲處斬)은 중국에서 시작되어 한국으로 전해진 사형 방법으로, 정확한 명칭은 능지처사(凌遲處死)입니다. '능지(凌遲)'라는 용어는 본래 '경사가 완만하여 천천히 힘들이지 않고 갈 수 있는 구릉지'를 의미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을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이는 형벌'의 의미로 변화했습니다. 속칭으로는 '살천도(殺千刀)'라고 불렸는데, 이는 '천 번 칼질하여 죽인다'는 뜻에서 유래했습니다.

능지처참의 집행 방법은 죄인이 발버둥쳐서 살을 포뜨기 힘든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아편을 투여하여 정신을 멍하게 만든 후, 작은 칼로 죄인의 살을 최대한 작게 계속해서 포를 떠서 잘라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는 말 그대로 '산 채로 회를 뜨는 형벌'로서, 보통 과다출혈이나 쇼크사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형을 끝까지 집행하기 위해 혈관을 피해서 살점만 도려내는 기술이 발달하기도 했습니다.

명나라 시대에는 환관 유근(劉瑾)이 3일에 걸쳐 6,000번의 칼질을 받은 기록이 있으며, 청나라 시대에는 칼질 횟수가 8회, 24회, 36회, 72회, 120회로 정해지기도 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뇌물을 주게 되면 집행 도중에 심장을 칼로 찔러 생명을 끊고 그 뒤에 신체를 베어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거열형의 정의와 특징

거열형(車裂刑)은 환열(轘裂) 또는 환형(轘刑)이라고도 불리며, 오우분시(五牛分屍) 또는 오마분시(五馬分屍)라는 명칭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 형벌은 죄인의 사지와 머리를 말이나 소에 묶고 각 방향으로 달리게 하여 사지를 찢는 형벌입니다. 거열형의 기원은 중국 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진나라의 재상 상앙(商鞅)이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거열형의 집행 방법은 죄인의 목과 팔다리를 다섯 대의 수레[五車]나 소와 말에 매달아 찢어 죽이는 방식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주로 수레를 이용했으나, 조선에서는 수레뿐 아니라 소와 말을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거열형을 실행하면 무릎 관절 혹은 허벅지 관절부터 찢어지는데, 대부분 무릎부터 파열되며, 손발만 뜯겨져 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실제로는 팔꿈치와 무릎에 줄을 묶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거열형을 고안한 상앙 자신이 결국 이 형벌로 처형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상앙은 진나라 효공이 죽자 정적들에게 모반자로 몰려 도망쳤지만, 자신이 만든 연좌제 법 때문에 객사에서 거부당하는 아이러니를 겪었고, 결국 체포되어 거열형으로 처형된 후 그 시체가 함양으로 끌고 가져져 거열에 처해졌습니다.

조선시대의 능지처참과 거열형

조선시대에는 명나라의 대명률(大明律)을 수용하여 능지처사형을 법제화했지만, 실제 집행 방식은 중국과 달랐습니다. 조선에서는 중국의 능지처사 방식이 너무 잔인하다고 여겨져 실제로는 거열형으로 대체 집행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407년 태종과 황희의 대화에서도 "이전에는 거열로 능지를 대신하였습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조선에서는 거열형으로 능지형을 대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의 능지처사는 대개 소나 말이 끄는 수레에 죄인의 팔다리와 목을 매달아 6등분으로 찢어 죽이는 거열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들어서는 샤를 달레 신부가 목격한 것처럼 "머리가 몸뚱이에서 떨어진 뒤에 사지를 자른다"는 방식으로 변화했으며, 이때는 칼로 사지를 절단하는 방식이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시대 능지처사형은 교수형, 참수형과 마찬가지로 공개적으로 집행되었습니다. 주요 집행 장소는 한양 도성 안의 군기시(軍器監), 저자거리, 무교(현재의 무교동) 등이었으며, 특히 현재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자리에 있던 군기시 앞길에서 가장 많이 행해졌습니다.

거열 후 잘린 머리는 효시(梟示) 또는 효수(梟首)라 하여 대개 3일간 매달아 두었으며, 현재의 종로2가 보신각 근처에 있던 철물교(鐵物橋)는 조선후기에 죄인의 머리를 내거는 단골 장소였습니다. 잘라낸 팔과 다리는 팔도 각 지역에 돌려 보내어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대표적인 능지처참 집행 사례

조선시대 능지처참의 대표적인 사례는 단종 복위를 꾀한 사육신의 처형입니다. 1456년 7월 10일(음력 6월 8일), 성삼문·이개·하위지·박중림·김문기·성승·유응부·윤영손·권자신·박쟁·송석동·이휘 등이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조정 대신들이 입회한 가운데 거열형을 당했습니다. 이들의 머리는 사흘 동안 저자에 효수되었으며, 심문 도중에 죽은 박팽년과 자결한 유성원과 허조에 대해서도 시체를 거열하고 효수했습니다.

1728년 영조는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문신 박필몽에게 능지처사형을 내렸는데, 박필몽의 머리는 저자거리에 6일간 내걸린 뒤 소금에 담가 반란군 소탕 본부인 도순무영에 보내져 다시 내걸렸고 팔다리는 각각 팔도에 보내졌습니다. 또한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은 1894년 중국 상하이에서 암살된 뒤 그 시신이 조선으로 운구되어 한강변 양화진 백사장에서 능지처사를 당했습니다.

두 형벌의 주요 차이점

능지처참과 거열형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집행 방법입니다. 능지처참은 죄인을 산 채로 작은 칼로 살점을 조금씩 도려내어 회를 뜨듯이 처형하는 방식인 반면, 거열형은 사지를 소나 말에 묶고 각 방향으로 달리게 하여 신체를 찢어 죽이는 방식입니다.

또한 형벌의 목적에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중국의 능지형은 죄인에게 극도의 고통을 가하여 천천히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던 반면, 조선의 능지처참(실제로는 거열형)은 참수가 먼저 이뤄진다는 점에서 사형수에게 큰 고통을 가하려는 것보다는 처형된 시신을 전시함으로써 백성에게 법의 엄정함을 경고하려는 목적이 더 컸습니다.

형벌의 대상과 범죄 유형

두 형벌 모두 일반적인 사형보다 훨씬 무거운 극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법률에 명시된 범죄 유형 총 2038개 가운데 사형에 처해지는 범죄 유형은 365개(17.9%)였으며, 그 중에서도 능지처사에 해당하는 범죄 유형은 15가지로 사형 범죄의 4.1%에 불과했습니다.

주요 대상은 반역, 가족 살해, 흉악한 살인을 저지른 자들이었습니다. 유교국가 조선에서는 체제 전복, 가족 질서 파괴와 같은 성리학 윤리를 무너뜨리는 행위를 가장 심각한 반사회적 범죄로 간주해 이런 극형을 내렸습니다.

사극과 대중 매체의 오해

현재 한국에서 능지처참과 거열형을 혼동하는 가장 큰 원인은 사극의 영향입니다. 대표적으로 사극 '왕과 비'에서 능지처참을 한다고 해놓고서는 실제로는 거열형을 보여주는 장면이 방영되어 이런 오개념을 더욱 확산시켰습니다. 다른 사극들에서도 거열형 장면이 '능지처참' 또는 '능지형'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이러한 오해는 조선시대에 실제로 능지형 판결이 내려져도 거열형으로 대체 집행되었고, 거열형조차도 본래의 방식으로 집행하는 예는 많지 않고 대부분 참형에 처한 뒤 그 시신의 사지를 거열형에 처한 것처럼 사후에 절단하는 형태가 많았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결국 한국에서는 거열형과 능지처참이 같은 형벌로 인식되게 되었습니다.

형벌의 폐지와 근대화

능지처참과 거열형은 모두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폐지되었습니다. 갑오개혁은 신분제(노비제)의 폐지, 조세의 금납 통일, 인신 매매 금지, 조혼 금지, 과부의 재가 허용과 함께 고문과 연좌법 폐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했습니다. 이는 유교적 사회 질서를 근대적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비합리적인 형벌의 폐지가 포함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청나라가 1905년 서구 형법을 도입하면서 능지형 같은 혹형을 폐지했습니다. 1904년 가을 베이징에서 왕웨이친(王維勤)이라는 죄수에 대한 능지처참이 집행된 것이 사진으로 기록된 마지막 사례로 알려져 있으며, 이 사진들이 서구에 전해지면서 '동양적 야만성'을 상징하는 기호로 잘못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서구의 시선과 오리엔탈리즘

능지처참에 대한 서구의 시선은 오리엔탈리즘의 대표적 사례로 분석되기도 합니다. 1904년 왕웨이친의 처형 사진이 서구 사회에 전해지면서 '중국적 잔혹성' 또는 '동양적 야만성'을 상징하는 기호로 재생산되었는데, 이는 서구가 동아시아에 대해 만들어낸 편견의 산물이었습니다. 실제로는 유럽에도 마녀나 이단, 반역자 등 중죄인을 처형할 때 거열형과 비슷한 방법이 사용되었으며, 루이 15세의 암살 미수범 로베르 프랑수아 다미앵이 말 3마리에 묶여 처형당한 사례가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사적 의의와 교훈

능지처참과 거열형의 역사는 인류의 형벌 제도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이 두 형벌은 모두 공개 처형을 통해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국가 권력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인도주의적 관점과 합리적 형벌 체계의 도입으로 폐지되었으며, 이는 형벌의 목적이 복수가 아닌 교정과 사회 복귀에 있다는 현대적 관점으로의 전환을 보여줍니다.

현재 한국은 1997년 이후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 사실상의 사형 폐지국이 되었지만, 헌법상으로는 여전히 사형제가 존재합니다. 능지처참과 거열형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형벌 제도의 인도주의적 발전과 함께, 정확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