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은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명재상(名宰相)으로, 청렴하고 효성이 지극한 인품으로 당대 및 후대에 깊은 존경을 받았으며, 문학과 음악에도 탁월한 업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그는 검소한 생활과 공정한 정사로 이름을 알렸고, 시조 문학의 발전에도 기여하였으며, 조선 초기 문화 및 행정제도의 근간을 닦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습니다.
생애와 가계
맹사성은 충청남도 아산 온양에서 출생하여,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입니다. 아버지 맹희도와 어머니 홍양조의 슬하에서 태어났으며, 고려 말의 명장 최영(崔瑩) 장군의 손녀사위이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상을 당한 뒤 묘 옆에 여막을 짓고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한 일화로 유명합니다. 이 일화로 후대에 효자정문(旌門)이 세워졌습니다.
과거 급제와 정치적 활동
맹사성은 1386년(고려 우왕 12) 문과에 급제해 춘추관검열, 전의시승, 우헌납 등 여러 벼슬을 지냈습니다. 조선이 건국되자 변동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뛰어난 행정력으로 각종 관직을 역임했으며, 태종·세종대에는 이조판서,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 최고위직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는 49년간 벼슬길에 올랐으나 부귀영화를 탐하지 않고 녹봉만으로 가계를 꾸려, 평생을 청렴하게 산 대표적인 청백리였습니다. 정승을 지냈음에도 집은 비가 새는 초라한 집 한 채와 피리 하나뿐이었다는 일화가 상징적입니다. 비가 많이 오던 날, 찾아온 대감이 집안 여기저기서 물이 새는 모습에 놀랐다가, 맹사성이 백성들 중엔 집이 없는 이도 많으니 자신은 오히려 호강하는 것이라 답했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청렴과 겸손의 대명사
맹사성은 검은 소를 타고 다니는 모습 덕분에 청렴함과 소탈함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실제로 일반 관료들이 말을 타고 다닐 때에도 그는 값비싼 말을 마다하고 검은 소를 탔으며, 높은 벼슬아치임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평범한 복장과 소탈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거만해진 자신에게 교훈을 준 무명 선사와의 ‘차 일화’는 맹사성의 인품을 형성한 상징적인 사건으로 회자됩니다. 선사가 차를 잔에 넘치게 따르자 “왜 넘치게 붓느냐”고 묻자,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친다”며 겸손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일화입니다. 이후 맹사성은 ‘고개를 숙이면 부딪칠 일이 없다’는 교훈대로 끝까지 겸손을 잊지 않았습니다.
업적과 문화적 기여
행정과 제도의 발전
맹사성은 《태종실록》, 《고려사》, 《팔도지리지》, 《신창경제육전》 등 국가의 중요 사서 및 행정 자료 편찬을 주도하며 조선 기초 제도를 수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태종실록》 편찬의 총감독을 맡았고, 편찬 후 세종이 실록을 보고 싶어하자 사관의 기록이 훼손될 것을 염려해 보고를 막았던 일화도 유명합니다.
음악과 예술
음악에도 심오한 조예를 보여, 박연 등과 함께 아악(雅樂) 및 향악(鄕樂) 등 궁중음악을 정비하였고, 직접 악기를 제작해 연주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조선 초기 음악제도의 기초를 닦은 인물로, 예악(禮樂)의 정비를 책임지고, 잘못된 향악의 가사·선율을 바로잡는 데 앞장섰습니다. 궁중의례에 우리 고유의 음악을 사용할 것을 주장했고, 실질적인 국악(國樂)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문학과 대표작
맹사성은 시조문학의 대가로, 우리나라 최초의 연시조인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의 작가입니다. 이 작품은 벼슬에서 물러나 자연 속 유유자적한 삶 속에서도 임금의 은혜에 대한 충절을 잊지 않는 조선 사대부의 정서를 대표적으로 보여줍니다. 봄·여름·가을·겨울의 계절감 속 자연과 유유자적하며, 충절(忠節)과 유교적 가치관을 노래하는 이 시조는 ‘강호가도’(江湖歌道) 문학의 시초이자, 이황의 《도산십이곡》, 이이의 《고산구곡가》 등에도 영향을 준 대표작으로 평가받습니다.
가족 및 가문
조부는 맹유(孟裕), 아버지는 맹희도(孟希道), 외할아버지는 고려 말의 명장 최영입니다. 맹사성은 최영의 손녀와 혼인하여 최영의 손녀사위가 되었습니다. 슬하에 6남 3녀를 두었으나, 자녀 정보는 비교적 적게 남아 있습니다.
죽음과 사후 평가
맹사성은 1438년(세종 20)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망 소식을 들은 세종은 모든 정사를 중지시키고 문무백관을 이끌고 그의 장례에 참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그의 덕성과 업적은 시대를 넘어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대표 일화와 상징
- 효행: 어머니 상을 당해 시묘살이 3년을 하며 효자문을 받은 사건。[5][6]
- 겸손: 잔이 넘치는 차를 교훈 삼아 ‘고개를 숙이면 부딪칠 일이 없다’는 일화。[18][21][23][12]
- 청렴: 정승 시절에도 소를 타고 다니던 모습, 피리 하나와 비 새는 집만 남긴 일화。[9][10][14][15][16][17][19][20][8][13]
- 검은 소: 검은 소를 정성껏 보살피고 타고 다녔으며, 사후에는 곁에 묻어주었던 우정의 상징。[14][16][20]
현대적 의의
맹사성은 오늘날까지 ‘청백리’, ‘효자’, ‘겸손’이라는 시대를 초월하는 덕목과 실무적 리더십, 문화예술인으로서의 품격 등 다양한 가치를 실현한 위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가 남긴 삶의 자세와 업적은 공직자뿐 아니라 모든 이들이 본받아야 할 귀감이며, 조선 초기 유교문화를 정립하는 데에도 막대한 공헌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