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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별곡(西京別曲) : 고려 시대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대표작

by jisikRecipe 2025. 9. 23.

서경별곡이란?

서경별곡(西京別曲)은 고려 시대에 창작된 작자 미상의 고려가요로, 현재 우리에게 전해지는 대표적인 이별의 노래 중 하나입니다. 작품명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 시대의 서경(西京), 즉 현재의 평양 지역을 배경으로 하여 창작된 이 작품은 《악장가사(樂章歌詞)》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전 3연 14절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동강에서 임과 이별하는 여인의 애절한 심정을 담고 있어 '가시리'와 함께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작품의 문학사적 의의

서경별곡은 고려가요 중에서도 특별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이 작품은 적극적인 여성 화자를 통해 당시의 진보적인 여성상을 보여줍니다. 기존의 고전 시가에 등장하는 소극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상과는 달리, 서경별곡의 화자는 이별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특징을 보입니다.

 

둘째, 서경별곡은 구체적인 지명을 통한 공간성을 강조한 작품입니다. '서경'과 '대동강'이라는 구체적인 지명을 제시함으로써 강한 향토애를 표현하고 있으며, 대동강은 '이별의 강'으로, 서경은 '사랑의 공간'으로 상징화되어 있습니다.

 

셋째, 이 작품은 공통 삽입가요의 특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서경별곡의 제2연은 같은 고려가요인 《정석가》의 마지막 연과 동일한 내용으로, 당시 민간에서 널리 불려지던 노래가 여러 작품에 차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작품의 구성과 내용

서경별곡은 내용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제1연(1-4절): 이별 거부와 사랑의 의지
화자는 서경에서 새로 터전을 잡았지만, 임과 이별하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가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표현합니다. "사랑만 해주신다면 울면서 따르겠습니다"라는 표현에서 화자의 절실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제2연(5-8절): 변함없는 사랑과 믿음의 맹세
이 부분은 일명 '구슬사'라고 불리며, 임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과 믿음을 구슬과 끈의 비유를 통해 표현합니다. "구슬이 바위에 떨어져도 끈이야 끊어지겠습니까? 천 년을 홀로 살아도 믿음이야 끊어지겠습니까?"라는 설의법을 통해 영원한 사랑을 다짐합니다.

 

제3연(9-14절): 사공에 대한 원망과 질투심
마지막 부분에서는 대동강을 배경으로 떠나는 임에 대한 원망과 질투심을 드러냅니다. 화자는 임을 태워주는 사공에게 "네 아내가 음란한 줄 몰라서 떠나는 배에 태웠느냐"며 애꿎은 분노를 쏟아내는 모습을 보입니다.

서경별곡의 문학적 특징

형식적 특징
서경별곡은 3·3·3조의 3음보 율격을 가진 분절체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매 구절마다 "아즐가"라는 조율음과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라는 후렴구가 반복되어 음악적 효과를 높이고 있습니다.

 

표현 기법
작품에는 다양한 수사법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반복법을 통해 운율감을 살리고, 설의법("끈이야 끊어지겠습니까?")으로 확신을 강조하며, 비유법(구슬과 끈)을 통해 사랑의 영원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화자의 성격
서경별곡의 화자는 기존 고전 문학의 여성상과는 다른 적극적이고 직선적인 성격을 보입니다. 이별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진보적인 여성상을 보여줍니다.

서경별곡의 미학과 골계미

서경별곡에서 주목할 만한 미학적 특징은 골계미(滑稽美)의 구현입니다. 특히 제3연에서 화자가 사공에게 쏟아내는 원망과 질투의 표현은 해학적인 요소를 담고 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이는 비극적인 이별 상황을 해학적으로 승화시킨 고려 시대 문학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서경별곡의 역사적 배경

서경별곡의 창작 배경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 작품이 단순한 남녀간의 이별 노래가 아니라 고려 시대 서경천도운동과 관련된 정치적 성격을 지닌 작품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특히 묘청의 난 이후 서경에 대한 왕조의 관심이 줄어든 상황에서, 서경인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로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서경별곡과 정석가의 관계

서경별곡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는 《정석가》와의 관계입니다. 두 작품은 제2연 '구슬사' 부분을 공유하고 있어, 당시 민간에서 널리 불려지던 공통 삽입가요가 존재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고려가요의 구전성과 민중적 성격을 잘 드러내는 증거로 평가됩니다.

이제현의 《소악부》에도 서경별곡의 일부가 한역되어 실려 있어, 당시 지식인층에서도 이 작품이 주목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경별곡의 현대적 의미

서경별곡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있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특히 여성의 주체적인 목소리와 적극적인 사랑 표현은 현대 문학에서도 중요한 모티프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구체적인 지역성을 바탕으로 한 서정성은 향토 문학의 전통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의 평가와 비판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서경별곡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는 비판을 받으며 궁중음악에서 제외되기도 했습니다. 성종 때에는 이 작품을 음란한 노래로 분류하여 삭제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다행히 《악장가사》에 원문이 보존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문학 교육에서의 서경별곡

현재 서경별곡은 고등학교 국어 교육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고려가요의 특징을 이해하고, 이별의 정한이라는 우리 문학의 전통적 정서를 학습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시리'와의 비교를 통해 화자의 성격 차이와 이별에 대한 다양한 태도를 학습할 수 있는 좋은 교재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서경별곡은 고려 시대의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는 대표작으로서, 적극적인 여성상, 구체적인 공간성, 그리고 골계미라는 독특한 미학을 통해 우리 문학사에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별의 아픔을 진솔하게 노래한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많은 독자들에게 감동과 위로를 주는 불멸의 고전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