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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 한명회 : 계유정난을 주도하고 조선 초기 정치와 외교를 이끈 세조의 양대 핵심 공신

by jisikRecipe 2025. 10. 24.

조선 초기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신숙주(申叔舟, 1417-1475)와 한명회(韓明澮, 1415-1487)입니다. 이 두 사람은 세종대의 문신으로 출발하여 계유정난을 통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도왔으며, 이후 세조대부터 성종대까지 조선 정치의 중심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세조는 평소 "한명회는 나의 장자방이고 신숙주는 나의 위징이다"라고 두 사람을 칭찬했는데, 이는 한명회가 세조의 권력을 설계했다면 신숙주는 그 권력이 제대로 활용되도록 보필하는 역할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신숙주의 생애와 업적

신숙주는 1417년(태종 17년) 8월 2일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고령, 자는 범옹, 호는 희현당 또는 보한재입니다. 신장의 아들로 태어나 1438년(세종 20년) 생원과 진사시에 모두 합격했고, 1439년(세종 21년)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가 되었습니다. 세종 때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와 연구에 기여했으며, 특히 언어학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신숙주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언어 구사 능력이었습니다. 그는 중국어, 일본어, 여진어, 몽골어, 위구르어 등 동아시아 언어에 모두 능통해 걸어 다니는 인간 번역기라 불렸습니다. 성삼문과 함께 한자음 정리를 위해 명나라의 언어학자 황찬을 여러 번 찾아가 질의했으며, 이는 훈민정음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1447년(세종 29년) 문과 중시에 4등으로 합격하여 당상관이 되었으며, 이후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을 적극 지지하면서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평소 인간관계가 넓었던 신숙주는 한명회, 권람 등과도 만나서 친분관계를 쌓았습니다. 당시 한명회는 개국공신의 손자였으나 경덕궁직이라는 낮은 직위에 있었는데, 신숙주와의 인연이 그의 정치적 출세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1443년 신숙주는 서장관으로 일본에 파견되어 대마도주와 계해약조를 체결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 경험을 바탕으로 후에 『해동제국기』를 저술하게 됩니다.

신숙주의 대표적인 업적 중 하나는 외교 분야에서의 탁월한 수완입니다. 그는 조선 역사상 외교를 관장하는 예조판서 직을 가장 자주 맡은 인물로, 사대교린의 외교 업무를 총괄했습니다. 1471년(성종 2년) 성종의 명을 받아 일본과 류큐국에 대한 정보를 정리한 『해동제국기』를 편찬했는데, 이 책은 일본의 정치, 외교, 사회, 풍속, 지리 등을 상세히 기록한 외교 자료집으로 조선 후기까지 일본 이해의 기본서로 활용되었습니다.

문신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숙주는 병력을 이끌고 여진족과 왜구 토벌에 여러 번 출정했으며, 『북정록』을 남겨 여진 정벌의 전말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1461년부터 1464년, 1471년부터 1475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의정부 영의정을 역임했으며, 1459년 불과 42세의 나이에 영의정에 오르는 등 당대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했습니다. 성종대에는 『동국통감』 편찬, 『국조오례의』 완성, 역서 편찬 등 다양한 문화 사업에도 참여했습니다.

한명회의 생애와 업적

한명회는 1415년(태종 15년)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청주, 자는 자준, 호는 압구정 또는 사우당입니다. 판후덕부사 한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문관제학 한상질이고, 아버지는 감찰 한기, 어머니는 예문관대제학 이적의 딸입니다. 과거에 여러 차례 실패한 후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했으며, 1452년(문종 2년) 경덕궁직을 시작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한명회의 정치 인생에서 전환점이 된 것은 수양대군과의 만남이었습니다. 당시 수양대군은 백두산 호랑이로 불리던 김종서와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에 의해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를 간파한 한명회가 자신의 친구 권람을 통해 수양대군과 직접 만날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한명회는 "어린 임금이 있을 때면 옳지 못한 이가 정권을 잡아 권세를 부리지만, 충의로운 신하의 반정으로 바로잡히게 되니, 이는 하늘이 정한 이치입니다"라며 수양대군에게 반정을 제안했습니다.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난이 발생했을 때 한명회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야사에 따르면 한명회는 직접 살생부를 작성하여 들어오는 대신들에게 생사의 신호를 보냈다고 하며, 이 과정에서 그동안 친분을 쌓았던 깡패, 무뢰배, 무인들을 모두 동원했습니다. 계유정난의 성공으로 한명회는 1등 공신이 되었고,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자 동덕좌익공신이 되어 우승지에 올랐습니다.

한명회는 활쏘기에도 능했고 문예보다는 병법과 병권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북방의 야인들을 토벌한 뒤에는 경계를 견고하게 하는 데 남다른 공적을 쌓았고, 이로 인해 1461년 특명으로 상당부원군에 진봉되었습니다. 1462년(세조 7년) 대광 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이 되었으며,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 체찰사를 겸임했습니다. 1463년에는 의정부 좌의정이 되었고, 결국 영의정에까지 올라 조선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한명회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오가작통법과 면리제가 있습니다. 세조대에 오가작통법을 만들어 1485년 『경국대전』에 등재했는데, 이는 5개의 호를 1개의 통으로 구성하고, 5개의 통으로 리를 구성하며, 3~4개의 리로 면을 형성하는 행정 구역 체계입니다. 오가작통법은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으며, 면리제는 조선이 멸망한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일제강점기와 현대 남북한의 행정 제도로 계속 사용되고 있습니다.

세조 사후 한명회는 원상으로서 어린 예종과 성종을 보필하며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특히 예종과 성종에게 딸을 왕비로 들여보내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두 명의 왕의 장인이 되었으며, 무려 30년이 넘도록 최고의 권세와 부를 누렸습니다. 1466년 이시애의 난이 발생했을 때는 신숙주와 함께 투옥되었다가 석방되기도 했으나, 예종 즉위 후 남이사건을 주도적으로 처리하여 1등 공신에 책봉되면서 다시 정계에 복귀했습니다. 성종대에는 성균관 장서 확충에도 공을 세웠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와 역할

신숙주와 한명회는 친구 사이였으며, 함께 세조 정권을 뒷받침하는 핵심 인물들이었습니다. 수양대군이 왕이 된 뒤 수양대군, 한명회, 신숙주가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는데, 이 자리에는 수양대군의 세자도 동석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권람, 신숙주 등과 인척관계를 맺고 세조 치정의 안정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세조가 정권을 잡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두 사람을 꼽는다면 단연 한명회와 신숙주입니다. 한명회는 계책이 뛰어난 책략가로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기 위한 전략을 수립했고, 신숙주는 탁월한 학식과 외교 능력으로 정권의 안정과 국정 운영을 담당했습니다. "세조를 왕으로 만든 것"이 한명회였다면, "세조를 왕답게 만든 것"은 신숙주라는 평가도 있을 만큼 그들의 역할은 서로 보완적이었습니다.

신숙주의 호인 '보한재'는 한명회의 호인 '압구정'과 비슷하게 별장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합니다. 한명회는 말년에 압구정을 짓고 은퇴를 시도했으나, 여전히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습니다. 신숙주는 1475년(성종 6년) 7월 23일 5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한명회는 1487년(성종 18년)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계유정난과 단종 폐위

1453년 계유정난은 신숙주와 한명회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한명회가 작전을 주도하고 신숙주가 수양대군의 측근으로 적극 협조하면서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등을 제거하고 수양대군이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이후 1455년 수양대군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선양 받아 세조로 즉위했고, 두 사람은 정난공신에 책록되었습니다.

1456년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었을 때 신숙주는 이를 저지하는 데 적극 협조했으며, 한명회 역시 사육신 주살에 관여했습니다. 특히 1457년 10월 신숙주는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을 제거할 것을 세조에게 요청했는데, 이는 유교 국가 조선에서 한때 자신이 모시던 옛 임금을 죽이라고 요청한 것으로 후대에 큰 비판을 받게 됩니다. 약 한 달 후 단종은 강원도 영월에서 세상을 떠났고, 이후 신숙주는 "변절자"의 상징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후대의 평가

신숙주와 한명회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극명하게 엇갈립니다. 신숙주는 뛰어난 학식과 능력으로 조선 초기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지만, 단종을 배신하고 세조 찬위 과정에서 적극 협조했다는 점에서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습니다. "숙주나물"이라는 표현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변절의 상징으로 굳어진 그의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능력과 업적만 놓고 보면 신숙주는 정도전, 조준, 황희와 더불어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명재상의 반열에 넣어도 손색이 없습니다. 조선의 많은 재상 중에서 신숙주만큼 다재다능했던 인물도 드물며, 6명의 임금을 섬기며 영의정을 두 차례 역임하면서 국방과 외교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가 죽은 후 사신은 "친히 일본에 건너가서 그 나라의 산천, 관제, 풍속, 족계에 대하여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평가했습니다.

한명회 역시 계유정난의 실질적 설계자로서 명분 없는 쿠데타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역적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북방 경략과 국방 강화, 오가작통법과 면리제 실시 등 실질적인 업적도 많습니다. 다만 능력을 악용해 치부에 힘써 많은 재산을 모으고 비정상적인 권력을 휘둘렀다는 비판도 받습니다. 갑자사화 때는 연산군의 생모 폐사에 관여했다 하여 부관참시되었다가 뒤에 신원되었습니다.

신숙주는 자신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현실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명분에 그친다는 실용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도 개혁보다 먼저 새로운 인재를 등용해 개혁 세력을 키워야 한다는 소신을 가졌는데, 당시로서는 혁신적 생각의 소유자였습니다. 후대 사림들에 의해 사육신과 단종의 복권이 추진되면서 신숙주는 의리를 저버린 인물로 더욱 비판받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신숙주와 한명회는 조선 초기 정치사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세조 정권의 양대 축을 이룬 인물들입니다. 한명회는 탁월한 정치적 감각과 전략으로 세조의 권력 장악을 도왔고, 신숙주는 뛰어난 학식과 외교 능력으로 국정 운영을 안정화시켰습니다. 두 사람 모두 계유정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깊이 관여했다는 점에서 도덕적 비판을 피할 수 없지만, 조선 초기 국가 체제의 확립과 발전에 실질적으로 기여한 공로 또한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들의 삶은 충성과 배신, 능력과 도덕성이라는 역사적 평가의 복잡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