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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숭겸 : 고려 개국을 이끈 충절의 무장으로 태조 왕건을 대신해 목숨을 바친 평산 신씨 시조

by jisikRecipe 2025. 11. 17.

신숭겸의 출생과 초기 생애

신숭겸(申崇謙, ?~927)은 후삼국시대 말기와 고려 초기를 대표하는 무장이자 충신입니다. 그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려사』 열전에는 광해주(光海州), 즉 현재의 강원도 춘천 지역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학계에서는 본래 곡성에서 태어나 후에 춘천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신숭겸의 원래 이름은 능산(能山) 또는 삼능산이었습니다. 그가 평산 신씨(平山申氏)의 시조가 되고 신숭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훗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건국한 후의 일입니다. 체격이 장대하고 무용이 뛰어났던 그는 일찍부터 무인으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특히 활쏘기에 뛰어난 명궁으로 알려졌습니다.

태봉의 무장에서 고려 개국공신으로

궁예 휘하에서의 활약

신숭겸은 궁예가 세운 태봉국(泰封國)의 기장(騎將)으로 출사하였습니다. 많은 전공을 세우며 마군장군(馬軍將軍)의 지위에 올랐고, 기병을 이끄는 장수로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태봉의 군사력을 이끄는 핵심 무장 중 한 명이었던 그는 왕건과 함께 궁예 휘하에서 여러 전투를 수행하며 실력을 쌓아갔습니다.

역성혁명과 고려 건국

그러나 궁예가 왕위에 오른 지 몇 년 만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폭정을 일삼자, 신숭겸은 이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습니다. 918년 신숭겸은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등 동료 기장들과 함께 왕건의 집을 찾아가 역성혁명을 권유하였습니다.

"폭군을 폐위하고 현명한 사람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대의이니 청컨대 공은 은(殷)과 주(周)의 옛일을 본받아 실행하셔야 하겠습니다"라고 간곡히 설득하였습니다. 왕건은 처음에는 충의를 내세우며 거절하였으나, 신숭겸 등은 "시기란 만나기 어렵고 알고도 놓치기 쉬운 것인데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 법입니다"라고 천명임을 강변하며 설득하였습니다.

결국 왕건이 거사를 허락하자, 신숭겸은 동료들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고려의 태조로 추대하여 새로운 왕조를 열었습니다. 이 공로로 신숭겸은 고려 개국 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책록되었습니다.

평산 신씨의 탄생

왕건은 개국공신이 된 신숭겸에게 평산(平山)을 관향으로 하는 신(申)씨 성을 사성하고, 숭겸(崇謙)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습니다. 이로써 평산 신씨가 탄생하게 되었으며, 신숭겸은 평산 신씨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유명한 일화가 전해집니다. 태조 왕건이 평산 삼탄으로 사냥을 나갔을 때, 하늘을 나는 기러기 세 마리를 보고 "누가 저 기러기를 쏘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신숭겸이 선뜻 나서서 "몇 번째 기러기를 맞히리이까"라고 묻자, 태조는 "셋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맞혀 보라"고 하였습니다. 신숭겸이 활을 당겨 쏘자 정확히 셋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맞혀 떨어뜨렸습니다. 태조는 그의 뛰어난 활솜씨에 감탄하여 기러기가 떨어진 그 지역인 평산을 본관으로 삼게 하였다고 합니다.

공산 전투와 장렬한 최후

전투의 배경

927년(태조 10) 9월, 후백제의 왕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여 경주로 쳐들어갔습니다. 견훤은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생포하여 강압적으로 자살하게 하고 온갖 만행과 약탈을 자행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 왕건은 크게 분개하여 친히 정예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정하였습니다.

공산 동수 전투의 참패

태조 왕건의 군대는 대구의 공산(公山) 동수(桐藪), 현재의 팔공산 지역에서 견훤의 후백제군과 맞닥뜨렸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는 고려군의 대참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후백제군의 기습 공격과 매복에 걸린 태조 왕건은 포위되어 일생일대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신숭겸의 숭고한 희생

태조가 적에게 포위되어 위급한 상황에 처하자, 신숭겸은 즉시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태조에게 "대왕마마, 어서 여기를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저와 갑옷을 바꿔 입으십시오"라고 말하며, 왕건의 투구와 갑옷을 자신이 입고 왕건의 백마에 올라탔습니다. 왕건은 일반 병졸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신숭겸은 왕건으로 위장한 채 어가(御駕)에 올라 군대를 통솔하며 후백제군을 유인하였습니다. 후백제군은 신숭겸을 왕건으로 착각하고 집중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신숭겸은 힘껏 싸우다가 결국 후백제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습니다. 함께 유인 작전에 나섰던 원보(元甫) 김락(金樂), 김철, 전이갑, 전의갑 형제 등도 함께 전사하였습니다.

후백제군은 신숭겸이 왕건인 줄 알고 그의 목을 베어 전리품으로 가져갔습니다. 이 사이 태조 왕건은 구사일생으로 포위망을 뚫고 간신히 탈출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5천 명 중 4,930여 명이 전사하고 불과 70여 명만이 살아 돌아오는 대참패를 당하였습니다.

신숭겸에 대한 추모와 예우

금두상과 삼분묘의 전설

전투가 끝난 후 태조 왕건은 신숭겸의 시신을 찾았으나 머리가 없어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왼쪽 발 아래에 북두칠성 같은 사마귀가 있다는 것을 듣고 시신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왕건은 신숭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순금으로 그의 두상(頭像)을 만들어 시신과 함께 장례를 치렀습니다.

묘지는 도선국사(道詵國師)가 태조 왕건의 묘터로 점지해 두었던 명당 자리를 하사하였으니, 바로 지금의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리입니다. 이곳은 한국 4대 명당 또는 조선 8대 명당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특이하게도 신숭겸의 묘는 봉분이 세 개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금으로 만든 두상 때문에 도굴을 염려하여 진짜 시신이 어느 무덤에 묻혔는지 알 수 없도록 한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지금까지도 세 봉분 중 어느 것이 실제 신숭겸의 유해가 안장된 곳인지는 후손들조차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시호와 추증

태조 왕건은 신숭겸에게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또한 그가 전사한 자리에 지묘사(智妙寺)라는 절을 세워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습니다. 신숭겸의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신보(申甫)를 원윤(元尹)으로 삼아 그의 가문을 예우하였습니다.

994년(성종 13) 4월, 신숭겸은 태사(太師)로 추증되고 태사개국장절공(太師開國壯節公)으로 높여져 종묘의 태조 묘정(廟廷)에 배향되었습니다. 이는 신하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였습니다.

1120년(예종 15) 예종은 신숭겸과 김락을 추도하여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를 지어 그들의 충절을 기렸습니다. 이처럼 신숭겸의 충성과 희생은 고려 왕조 내내 높이 평가되고 기억되었습니다.

신숭겸을 기리는 유적지

춘천 장절공 묘역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위치한 신숭겸 장군 묘역은 강원도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묘역에는 세 개의 봉분과 함께 신도비, 장절사(壯節祠) 사당, 상충재(尙忠齋), 전사청(典祀廳) 등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춘천 장절공 신숭겸 신도비는 1805년(순조 5) 후손 신대현(申大顯)과 평산 신씨 종인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2009년 5월 22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5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비문은 순조의 부마였던 외손 김조순(金祖淳)이 지었고, 글씨는 당대의 명필이자 후손인 신위(申緯)가 썼으며, 전액(篆額)은 당시 좌의정이었던 서매수(徐邁修)가 썼습니다.

매년 음력 3월 3일에는 평산 신씨 후손들이 모여 춘향대제를 올리며 신숭겸 장군의 충절을 기리고 있습니다.

대구 신숭겸 장군 유적지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에는 신숭겸 장군 유적지가 있으며, 1982년 3월 4일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곳은 공산 전투에서 신숭겸이 전사한 곳으로, 총 면적 45,180㎡에 순절단(殉節壇), 고려장절신공 순절지지비, 표충사(表忠祠), 상절단, 홍살문 등의 시설이 있습니다.

1607년(선조 40) 신숭겸의 외손인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柳永詢)이 옛 절터에 사당과 충렬비를 건립하고 표충단을 쌓아 장군의 충절을 추모하였습니다. 1672년(현종 13) 사당은 표충사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기타 배향 장소

신숭겸은 연천의 숭의전(崇義殿)에 태조와 함께 배향되었으며, 전라남도 곡성의 양덕사(陽德祠), 대구광역시의 표충사,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 평산의 태백산성사(太白山城祠) 등에 제향되었습니다. 도포서원은 1650년(효종 1) 지방 유림들이 신숭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으나,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었습니다. 현재 춘천시는 도포서원 복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평산 신씨 후손들의 활약

신숭겸을 시조로 하는 평산 신씨는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문가가 되었습니다. 시조의 충절 정신을 이어받아 대대로 충신과 명장들이 나왔습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인물들

신립(申砬, 1546~1592)은 신숭겸의 후손으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무신입니다. 1567년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1583년 북방에서 쳐들어온 여진족 니탕개를 격퇴시키는 등 6진을 지키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순변사로 임명되어 충주 탄금대 전투를 지휘하였으나 안타깝게 전사하였습니다. 시조 신숭겸과 마찬가지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이었습니다.

신경진(申景禛)은 신립의 아들로,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며 영의정에 올랐습니다. 그는 인조 묘정에 배향되는 영예를 얻었으며, 병자호란 때도 활약하였습니다.

신호(申浩, 1539~1597)는 장절공 신숭겸의 후손으로, 1567년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내외직을 역임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을 도와 옥포해전, 사천해전, 한산도대첩, 안골포 해전 등에서 여러 공을 세웠습니다. 정유재란 때 고룡산성수어사로 있다가 남원성 구원 전투에 참전했다가 전사하였습니다. 선무원종공신 1등에 이름을 올리고 형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무장입니다.

근대의 의병장 신돌석

신돌석(申乭石, 1878~1908)은 평산 신씨 출신으로, 한말 항일 의병 투쟁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평민 출신으로는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으로, 1906년 을사늑약 이후 영해, 영덕, 평해에서부터 삼척, 양양, 강릉, 원주, 안동, 영양 등 경상북도 북동부와 강원도 일대에서 신출귀몰하며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교묘한 게릴라 전법으로 장기간 전투를 계속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며, 29세의 어린 나이에 3,0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렸습니다. 1907년 13도 창의군 교남창의대장으로 천거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1908년 현상금에 눈이 먼 주민에게 배신당해 독살되어 30세의 나이로 순국하였습니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신숭겸의 역사적 의의

신숭겸은 고려 건국의 핵심 인물이자 충절의 상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궁예의 폭정을 바로잡기 위해 역성혁명을 주도하여 고려 건국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공산 전투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태조 왕건을 구함으로써 고려 왕조가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의 희생이 없었다면 왕건은 공산 전투에서 전사하였을 것이고, 고려의 건국은 좌초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신숭겸의 충절은 고려 왕조 500년 역사의 토대를 만든 것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고려를 이은 조선 왕조에서도 신숭겸은 충절의 본보기로 삼았으며,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혜택을 입었습니다. 평산 신씨는 조선시대에 상신 11명, 대제학 5명, 판서 20명을 비롯하여 문과 급제자만 302명을 배출하는 등 대표적인 명문가로 자리잡았습니다.

신숭겸의 충성심과 희생정신은 시대를 초월하여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유적지는 오늘날까지도 역사 교육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으며, 진정한 충성과 희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신숭겸 관련 주요 정보

구분 내용
출생 미상 (전라도 곡성 또는 강원도 춘천 추정)
초명 능산(能山)
본관 평산(平山) - 왕건이 사성
시호 장절(壯節)
주요 직책 태봉 마군장군 → 고려 대장
개국 공신 918년 고려 개국 1등 공신
전사 927년 공산 전투에서 왕건을 구하고 전사
추증 994년(성종 13) 태사(太師) 추증
배향 태조 묘정, 곡성 양덕사, 대구 표충사, 춘천 도포서원 등

맺음말

신숭겸은 후삼국시대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통일 왕조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918년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건국한 개국 일등공신이 되었고, 927년 공산 전투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태조 왕건을 구하였습니다.

그의 충절은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날까지도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강원도 춘천과 대구 등지에 그를 기리는 유적지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평산 신씨의 시조로서 후손들에게 충성과 의로움의 정신을 전해주었으며, 그의 후손들 역시 신립, 신경진, 신호, 신돌석 등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습니다.

한국 4대 명당에 묻힌 신숭겸 장군의 묘역은 단순한 묘소를 넘어 충절과 희생정신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충성심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으며, 진정한 충성과 희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역사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