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현비의 출생과 가문 배경
공헌현비 권씨(恭獻賢妃 權氏, 1391년 10월 26일 ~ 1410년 10월 24일)는 명나라 제3대 황제인 영락제 주체(朱棣)의 후궁으로, 조선에서 명나라에 보내진 최초의 공녀 출신입니다. 권현비는 공조전서(工曹典書) 권집중(權執中)의 딸이자 권영균(權永均)의 누이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안동 권씨로 경상도 안동부 출신입니다. 농민 출신이라는 기록도 있으나, 공조전서라는 관직을 가진 집안 출신으로 보아 양반 가문의 규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권현비가 살았던 시기는 조선 건국 초기로, 명나라와의 관계가 국가 외교의 핵심이었던 시기입니다. 명나라 홍무제는 고려와 조선에 대해 공녀 차출을 금지했으나, 그의 넷째 아들이자 후계자인 영락제는 조선의 여자들이 상냥하고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공녀를 요구하게 됩니다. 이는 조선 여성사에 있어 새로운 수난의 시작이었습니다.
조선 최초 공녀 선발의 과정
1408년(태종 8년, 영락 6년) 명나라 환관 황엄(黃儼)이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조선에 왔습니다. 황엄은 귀국을 앞두고 태종에게 영락제가 "조선에 예쁜 처녀가 있거든 몇 명을 선택해 데려오라"고 언급했다는 사실을 귀띔했습니다. 이러한 요구의 배경에는 과거 태종이 세자(양녕대군)와 명나라 황녀 간의 국혼 논의를 피하기 위해 세자가 이미 장가를 갔다고 거짓말한 것을 황엄이 무마해준 은혜에 대한 보답의 의미도 있었습니다.
이에 태종은 즉시 진헌색(進獻色)을 설치하고 금혼령을 내렸습니다. 각 도에서 노비가 없는 양반과 서인의 딸을 제외한 13세에서 25세 사이의 양가(良家) 처녀들을 선발하여 궁으로 데려오도록 명했습니다. 조선에서 명나라에 공녀를 진헌한 것은 이때가 최초로, 이는 이후 관례로 정착되어 조선 여성사의 큰 수난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1차 선발된 후보들에게는 명나라의 복식과 화장을 시켜 환관 황엄이 직접 선발하도록 했는데, 이 중 1등급으로 뽑힌 5인 중에서도 일 등으로 선발된 여인이 바로 권씨였습니다. 같은 해 11월 12일, 권씨는 다른 선발된 여성들과 함께 황엄을 따라 명나라로 떠났습니다.
영락제와의 운명적 만남
명나라로 간 권씨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영락제의 후궁전에 머물렀습니다. 1409년(영락 7년) 2월 9일, 조선의 진헌녀를 보기 위해 북경으로 돌아온 영락제와 처음 조우했습니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2월 9일로 기록되어 있으나, 명태종실록에는 2월 6일로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날짜는 2월 6일로 추정됩니다.
명사(明史)에는 권현비에 대해 "자질이 꽃나무가 무성하듯 아름다우면서 순수하고 옥퉁소를 잘 불어 황제가 사랑하고 가엽게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락제는 백옥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권씨의 아름다움에 반해 "너는 무슨 재주가 있느냐?"고 물었고, 권씨가 옥소(玉簫, 옥피리)를 꺼내 불자 아름다운 곡조가 울려 퍼져 영락제가 매우 기뻐했다고 전해집니다.
영락제는 그날 밤을 권씨와 보냈고, 이튿날 권씨를 빈(嬪)으로 봉했다가 한 달 후에는 다시 현비(賢妃)로 책봉했습니다. 현비는 정1품에 해당하는 높은 지위로, 황후 다음의 서열입니다. 권현비의 책봉과 함께 그녀의 오빠 권영균은 광록시경(光祿寺卿)이라는 종3품 벼슬을 받았습니다. 영락제는 권영균에게 채단(綵段) 60필, 채견(綵絹) 300필, 금(錦) 10필, 황금 2정(錠), 백은(白銀) 10정, 말 5필, 안장[鞍] 2면(面), 옷 2벌[襲], 초(鈔) 3천 장을 하사했습니다.
육궁을 관장한 내명부의 실질적 주인
1407년 영락제의 정비(正妃)인 인효문황후 서씨(仁孝文皇后 徐氏)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효문황후는 명나라 개국공신 서달(徐達)의 딸로, 17살 때 영락제를 만나 30여 년 동안 음으로 양으로 보필한 현처양모(賢妻良母)로 존경받았던 인물입니다. 황후 서씨가 세상을 떠나자 영락제는 황후의 여동생 서묘금(徐妙錦)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서묘금은 "정원의 예쁜 꽃이 되어 다른 사람들이 간섭하도록 하기보다는 산속의 작은 풀이 되어 혼자서 피고 지고 싶다"며 불교에 귀의하겠다고 하여 영락제의 청혼을 거절했습니다.
서 황후가 세상을 뜬 후 영락제는 다시 황후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대신 권현비에게 육궁(六宮)의 일을 관장하게 하여, 한낱 공녀로 끌려간 조선의 여인이 대명제국의 내명부를 총괄하는 실질적인 황후의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영락제는 "권비에게 육궁의 일을 맡아보도록 하였다"는 말을 직접 남겼습니다. 이는 사실상 황후의 자리를 내준 것과 다름없었으며, 권현비는 조선 여인임에도 자금성의 안주인으로 등극했습니다.
당시 궁궐에는 권현비가 아름다운 자색을 가지고 옥퉁소를 잘 부는 사실이 널리 회자되었습니다. 궁궐의 많은 여인들은 앞을 다투어 권현비를 본받았으며, 궁중에서 다른 후궁들조차도 권씨를 따라 옥피리 부는 법을 연마했다고 합니다. 미모도 아름다운데 재주도 뛰어나 같은 여자들 사이에서도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당시 황족이나 여관들도 권현비의 모습을 담은 궁사(宮詞)를 지었는데, 영락제의 이복동생 주권(朱權)은 "옥꽃이 씨앗을 옮겨 깊은 궁궐 안으로 들어와 그 그윽한 향기 짙어 늦은 바람과 운을 맞추니 군왕의 가마와 걸음을 멈추게 하누나. 옥퉁소 소리가 맑게 울리니 밝은 달 속에 퍼지네"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북방 정벌 동행과 비극적인 죽음
영락제는 권현비를 어디를 가나 항상 곁에 두었습니다. 영락 8년(1410년) 영락제가 친히 50만 대군을 거느리고 몽골의 잔존 세력인 달단족(韃靼族)을 정벌하러 출정했을 때, 권현비도 함께 동행했습니다. 한시라도 그녀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던 황제의 마음이었습니다. 권현비는 스스로 어가(御駕)를 모시겠다고 자청했고, 영락제는 흔쾌히 응했습니다.
전쟁에서 신이 나서 전승을 거두고 초가을에 군대를 돌려 당시의 수도인 남경으로 귀환하던 중, 산동지방의 임성(臨城, 현재의 산동성 조장시 설성)에 이르렀을 때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양향(楊香) 또는 제남로(濟南路)라고도 불리는 이 지역에서 권현비가 갑자기 몸이 이상해져 미처 손을 써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나는 변고가 생긴 것입니다. 1410년 10월 24일, 권현비는 "다시는 폐하를 모실 수 없게 되었구나"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궁에 들어온 지 1년 6개월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전쟁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던 영락제는 가장 아끼던 애인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자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권현비가 끝내 세상을 떠나자 영락제는 슬픔에 말을 잇지 못하고 통곡했다고 합니다. 영락제는 죽어서 나아가는 권비의 관을 붙잡고 애통해하기가 이를 데 없었으며, 친히 그녀의 제사를 지냈습니다.
영락제의 깊은 애도와 추모
오빠 권영균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동생은 이미 사망한 뒤였습니다. 영락제는 권영균을 만나서는 눈물을 머금고 탄식을 쏟아내느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습니다. 권비가 죽고 난 뒤에 영락제는 다시 권영균에게 고명(誥命)을 내렸고, 오빠를 궐 안에서 만날 때마다 권비 생각이 나서 눈물을 흘리며 탄식을 하며 너무 울어 말을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영락제는 황엄을 조선에 사신으로 보내 권현비 유족들에게 애도와 위로의 말도 전했습니다. 태종 10년에는 권비의 일족인 유정현이 북경에 도착하자 영락제가 황엄을 시켜 권비의 명을 전하게 했으며 별도로 비단과 돈, 안장이 있는 말을 하사했습니다. 권현비의 사망 소식을 접한 태종은 판전농시사 권집지를 북경으로 급하게 파견했는데, 그는 권집중의 아우이자 권현비의 숙부였습니다.
영락제는 권현비를 제남로에 가매장했다가 먼저 죽은 인효문황후와 함께 합장하려 했습니다. 이는 권현비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명나라 대신들이 비(妃)와 황후를 합장할 수 없다고 반대하는 바람에 황제의 뜻이 관철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권현비의 무덤은 현재까지도 중국에서 잘 관리되고 있다고 합니다.
영락제는 권현비가 떠난 지 15년이 지나고,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었던 그 순간까지도 그녀를 그리워했다고 전해집니다. 만년에도 권비를 그리워하며 "짐이 늙었구나 음식이 맛이 없다", "권비가 살았을 때는 바치는 음식들이 아주 입에 맞았는데, 죽은 후에 음식, 술, 옷빨래 등이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조선에서 진상품으로 조선의 음식을 바쳤는데 영락제는 "권비가 살아 있을 적에 먹었던 맛과 다른 것 같다"라면서 통 입맛이 돌지 않는 모습을 보였으며, 조선의 음식과 술, 식재료를 밥상에 올리라며 애타하게 찾았습니다.
독살설과 어여의 변(呂呂之變)
권현비의 죽음은 황실에 뜻하지 않은 피바람을 몰고 왔습니다. 1414년, 권현비 사후 4년 만에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조선의 조공사절단 윤자당(尹子當)이 황제를 알현하는데, 영락제가 조선 출신 후궁들 사이의 다툼 때문에 권현비 권씨가 죽었다면서 함께 간 여미인(呂美人)이 권비를 독살했다고 문제를 삼았습니다.
권씨의 노비와 여씨의 노비가 서로 싸울 때 권씨의 노비가 "네 주인(여씨)이 약을 먹여 우리 주인(권씨)을 죽였다"고 소리치는 바람에 그 말이 영락제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영락제는 사건 경위를 조사해서 관련된 내관과 노비 등 수백 명을 죽이고 여씨에게는 낙형(烙刑, 달군 쇠로 지지는 형벌)을 가해 1개월 만에 죽게 했습니다.
영락제가 조선의 사신에게 이 사실을 알린 것은 조선에 있는 여씨 가족을 모두 처형하라는 얘기였습니다. 권비 독살사건을 보고받은 태종은 의정부와 육조를 불러서 논의하고 여미인의 모친과 친족을 의금부에 감금했습니다. 조정 대신들은 여미인의 모친을 죽이거나 친족을 노예로 삼자고 건의했고, 영락제는 조선의 조치가 옳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10년 후인 1424년(세종 6년), 놀라운 진상이 밝혀집니다. 중국 상인의 딸 여씨가 황궁에 들어왔는데, 조선에서 온 여미인과 같은 성씨라서 가깝게 지내려고 했으나 여미인이 사귐을 허락하지 않자 권비를 독살했다고 무고한 것이었습니다. 명나라 출신 후궁 여씨는 또 다른 궁녀 어씨와 함께 환관들과 간통하다가 들통 나자 목 매어 죽었습니다. 화가 난 영락제가 여씨의 시비를 국문하다 권비 사건의 진상까지 드러났는데, 중국인 여씨가 조선 출신 여미인을 무고한 것이라고 자백했습니다.
이성을 잃은 영락제는 죽은 여씨의 시녀들을 고문하여 언급된 인물 모두를 남김없이 처형해버렸습니다. 이 당시 고문과 억지 자백으로 죽어나간 사람들은 무려 2,800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이 사건은 발단이 된 두 궁녀의 성씨를 딴 '어여의 변(呂呂之變)' 또는 '어여의 난'으로 불리우며 중국 황실 역사상 최악의 내부 학살극이자, 영락제의 광기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으로 회자됩니다.
공녀로 끌려갔던 조선 여인들 사이에서 권비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소문이 영락제의 귀에 들어가면서 사실 여부를 따질 것도 없이 분기탱천한 영락제는 수십 명에 달하는 조선 공녀들을 몰살하고 땅에 파묻어 버리는 참혹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 모함은 시퍼런 칼날이 되어 타국 땅에 끌려온 기구한 운명의 조선 여인들에게 비극적이고 참혹한 죽음을 초래했습니다.
역사적 의미와 평가
권현비는 조선에서 명나라에 보내진 최초의 공녀로, 조선 공녀 제도의 시작점에 있는 인물입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와 정종 때는 공녀 차출이 나타나지 않다가, 영락제가 명나라를 집권한 기간인 태종과 세종 초기 동안 영락제의 요청으로 조선은 공녀를 다시 보내었습니다. 이는 고려 시대부터 이어진 공녀 차출이 조선 시대에도 계속된 것으로, 조선 여성사의 수난으로 평가됩니다.
권현비는 조선 출신 공녀 중에서 가장 많은 총애를 받은 인물이며, 명나라 역사서인 명사(明史) 후비전(后妃傳)에 기록된 유일한 조선 여인입니다. 이는 그녀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명사 후비전에는 "공헌현비 권씨, 조선인...옥피리를 잘 불었으며, 황제가 그녀를 아꼈다"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권현비의 등장으로 조선과 명을 잇는 육로가 완전히 개방된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명나라 홍무제는 고려나 조선과의 관계가 악화하면 징벌의 의미로 육로를 통한 조공을 금했고, 이로 인해 바다로 조공을 하다 배가 난파하는 사고가 빈발했습니다. 그러나 영락제는 권현비를 만나러 오는 권영균을 위해 모든 조선 사신에게 육로로 왕래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이는 권현비가 양국이 안정적이고 빈번한 교류를 하는 데 교두보 역할을 했음을 의미합니다.
권현비의 가족들도 그녀 덕분에 조선에서 상당한 혜택을 받았습니다. 오빠 권영균은 명나라에서 종3품의 광록시경이라는 벼슬을 받았고, 영락제는 권씨의 부친에게도 광록경이란 벼슬을 내렸습니다. 이는 공녀 출신이 황후나 후궁이 되면 그의 친정이 상당한 혜택을 보았던 고려 시대의 관례가 조선 초기에도 이어진 것입니다.
영락제가 살아있는 동안 공녀 차출은 총 3번 있었습니다(1408년, 1409년~10년, 1417년). 그 중 첫 번째 공녀에 속하여 그 중 첫째라고 하는 권씨는 영락제의 본처 인효문황후의 1407년 사후에 명나라에 공녀로 바쳐졌고, 영락제의 총애를 받아 현인비(顯仁妃)에 봉해졌습니다. 영락제 사후에는 선덕제가 딱 한 번 공녀를 요구했고, 이후에는 정덕제가 조선에 공녀를 요구하려고 하였으나 급사하는 바람에 사신이 요동에서 발길을 돌렸으며, 그 후 조선에서 공녀 차출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무덤과 후대의 추모
권현비의 무덤은 산동성 조장시(棗莊市) 역현(嶧縣) 땅, 정확히는 낭낭분촌(娘娘墳村)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낭낭분촌의 지명 석비 기록에 의하면 낭낭분촌은 명 영락 연간에 왕성(王姓)이 등현황신장(滕縣黃辛莊)에서 옮겨와 촌락을 건립했다고 합니다. 영락제는 권현비의 시신을 낭낭분촌(당시 제남로 소속지)에 빈장(殯葬)하고, 이곳의 사람들로 하여금 부역을 면제시켜 무덤을 수호하도록 했습니다. 낭낭분촌을 처음 건립한 왕씨들은 바로 영락제의 명에 의하여 무덤을 수호하기 위해 등현황신장에서 이주해온 것입니다.
권현비의 무덤은 현재까지도 중국에서 잘 관리되고 있으며, 안동 권씨 후손들이 가끔 찾아 소주잔을 올린다고 합니다. 산동성 남쪽 조장시 한편에 반도 여인들의 슬픈 과거사를 말없이 웅변하는 권비 묘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 것입니다. 권현비는 사후 공헌(恭獻)의 시호를 받아 공헌현비(恭獻賢妃)로 불립니다.
최부의 표해록(漂海錄)에도 권현비의 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488년(성종 19년) 제주도를 출발한 최부 일행의 배가 표류하다가 중국 절강성 영파부에 표착하여 중국 관원의 호송을 받으며 북경으로 가는 도중 산동성을 지나면서 권현비의 묘를 참배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결론
권현비는 조선 최초의 공녀로서 명나라 영락제의 총애를 받아 정1품 현비로 책봉되고 내명부를 관장한 여인입니다. 백옥같이 하얀 피부와 아리따운 자태, 뛰어난 옥피리 연주 실력으로 영락제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1407년 인효문황후가 사망한 후 새 황후를 세우지 않은 영락제로부터 사실상 황후의 역할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1년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으로 끝났습니다. 1410년 영락제의 북방 정벌에 동행했다가 개선 도중 산동성 임성에서 급사했고, 그녀의 죽음은 이후 독살설과 어여의 변이라는 비극적 사건으로 이어져 2,8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참극을 낳았습니다.
권현비는 조선 여성사에 있어 공녀 제도라는 수난의 시작점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명나라 역사서에 이름을 남긴 유일한 조선 여인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녀의 존재는 양국 관계에서 육로 개방의 계기가 되었고, 그녀에 대한 영락제의 깊은 애정은 사후 15년이 지나도록 계속되었습니다. 타국 땅에 끌려가 짧은 생을 마감한 비운의 여인이었지만, 그녀가 남긴 역사적 족적은 오늘날까지도 한중 관계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