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3월 31일, 만우절을 하루 앞둔 화요일 아침, 거짓말 같은 사건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일본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출발한 일본항공 351편 요도호가 일본 적군파 9명에 의해 공중 납치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항공기 납치를 넘어 동북아시아 전체를 뒤흔든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사건의 발단과 배경
요도호 납치 사건은 1970년대 일본 사회의 격동적인 분위기 속에서 발생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전후 복구를 마치고 고도성장을 이루어가던 시기였지만, 동시에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와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이 극에 달했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였습니다.
적군파는 일본의 극좌 학생운동 조직으로, 폭력 혁명을 통해 일본 사회를 전복시키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이미 경찰서 습격사건 등으로 당국의 수사를 받고 있던 상황에서 궁지에 몰려 있었고, 해외 망명 기지가 필요하다는 '국제근거지론'에 따라 북한을 목표로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북한을 '이상적인 혁명 국가'로 여기고 있었으며, 이곳에서 군사훈련을 받아 일본 혁명의 전진기지로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납치 사건의 전개
1970년 3월 31일 오전 7시 33분, 도쿄 하네다 공항을 출발하여 후쿠오카로 향하던 일본항공 351편에는 승무원 7명과 승객 122명이 탑승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유일한 한국인 승객인 김원동 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후지산 상공을 지나던 중, 승객을 가장하고 탑승한 적군파 요원 9명이 일본도와 권총, 사제 폭탄으로 무장하고 일제히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납치범들은 "우리는 공산주의자 동맹 적군파다. 우리는 북조선으로 가서 군사훈련을 할 것이다"라고 선언하며 기장에게 북한의 평양으로 향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들의 리더였던 타미야 타카마로는 인질들에게 자신의 성을 밝히며 "우리는 내일의 죠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는 당시 일본에서 인기를 끌었던 권투 만화 '내일의 죠'에서 따온 것으로, 적군파의 패기와 이념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발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베테랑 기장인 이시다 신지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1만 시간 이상의 비행 경험을 가진 그는 "이 비행기는 국내선이라 평양까지 갈 연료가 부족하다. 연료를 더 넣어야 한다"며 납치범들을 설득하여 후쿠오카 공항에 오전 8시 59분 착륙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연료는 충분했지만, 기장은 일본 당국이 대응할 시간을 벌기 위해 기지를 발휘한 것이었습니다.
김포공항 유도 작전: 사상초유의 더블 하이재킹
후쿠오카 공항에서의 5시간 협상 끝에 여성과 어린이, 노약자 등 23명이 석방되었고, 오후 1시 59분 요도호는 북한을 향해 재이륙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사건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요도호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던 한국 당국이 기발한 작전을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당시 28세였던 채희석 공군 관제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직접 지시를 받고 김포공항 관제탑에서 평양 관제소로 위장하여 요도호와 교신하기 시작했습니다. 미 연방항공국 관제사 면허를 가진 몇 안 되는 한국인이었던 채희석은 "여기는 평양이며 진입 관제를 실시한다"고 무선으로 속여 요도호를 김포공항으로 유도했습니다.
항공 지식이 없었던 납치범들은 이 속임수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오후 3시 15분경 요도호는 김포공항에 착륙했습니다. 공항에는 이미 '적군파 평양 도착 환영'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군인들은 북한군으로 위장하여 납치범들을 완전히 속였습니다. 적군파는 드디어 북한에 도착했다며 환호성을 올렸지만, 곧 미군 비행기가 노출되면서 속임수가 발각되었습니다.
3일간의 팽팽한 대치
김포공항에서의 대치는 3일간 계속되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정래혁 국방부 장관, 백선엽 교통부 장관, 박경원 내무부 장관이 참여하여 협상을 벌였습니다. 적군파는 승객들을 인질로 잡고 북한으로 갈 것을 계속 요구했고, 한국 정부는 이들을 저지하려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특수부대 투입도 검토되었지만, 승객의 안전을 우려한 일본 정부의 요청으로 무산되었습니다. 특히 요도호에는 미국인 승객 2명이 탑승해 있었기 때문에 미국 정부의 압력도 있었습니다.
마침내 4월 3일, 야마무라 신지로 일본 운수성 정무차관이 "내가 대신 인질로 간다면 승객들을 풀어줄 수 있겠나"라고 제안하며 극적인 해결책이 마련되었습니다. 납치범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99명의 승객을 모두 석방하고 야마무라 차관을 새로운 인질로 잡았습니다.
북한으로의 최종 여행
79시간의 긴 대치 끝에 오후 6시 5분, 납치범 9명과 조종사 3명, 그리고 야마무라 차관을 태운 요도호는 김포공항을 이륙하여 북한으로 향했습니다. 1시간 반 후 비행기는 평양 미림 비행장에 착륙했습니다. 해가 진 후였는데 미림 비행장에는 야간 항공등화시설이 없어서 이시다 기장이 2차 대전 때의 경험을 살려 육안으로 야간 착륙을 성공시켰다고 합니다.
북한은 적군파의 정치적 망명을 허용하는 대신 다음날 야마무라 차관과 승무원 3명, 그리고 항공기를 일본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일본에서는 NHK가 내보낸 특별 방송 '요도호 승객들 돌아오다'가 40%를 넘는 폭발적인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
적군파의 북한 생활과 최후
북한으로 망명한 적군파 9명은 처음에는 혁명의 성지에 도착했다며 기뻐했지만, 현실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북한에는 그들이 꿈꾸던 '인민을 위한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북한 정권의 일본인 납치 계획에 협조하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리더였던 타미야 타카마로는 이후 북한에서 주체사상을 받아들이고 과거의 적군파 활동을 반성하는 내용의 '우리 사상의 혁명'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는 1995년 11월 30일 자녀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바쁘게 활동하던 중 평양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9명의 납치범 중 일부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해외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어 일본으로 송환되었습니다. 2014년 기준으로 4명이 북한에 생존해 있었으며, 이들은 트위터를 개설하여 "일본에 돌아가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숨겨진 영웅들의 이야기
요도호 사건에서 일본에서는 야마무라 차관과 이시다 기장이 영웅으로 칭송받았지만, 정작 130명의 생명을 구한 진짜 영웅인 채희석 관제사는 오랫동안 침묵해야 했습니다. 사건 3일 후 그에게는 "앞으로 요도호 사건에 대해 일절 입을 다물라"는 함구령이 떨어졌고, "만약 말하면 쏴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받았습니다.
채희석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사건 1년 2개월 후인 1971년 6월 군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후 10년간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고, 20년 후에야 유엔군 사령부의 도움으로 DMZ에서 토산물 가게를 운영하며 정상적인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63세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가족들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역사적 의의와 현대적 재조명
요도호 사건은 일본 최초의 항공기 납치 사건으로서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 이 사건은 1970년대 일본 사회의 이념적 갈등과 세대 간 대립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둘째, 한국의 기지 있는 대응으로 대형 참사를 막을 수 있었던 국제적 협력의 사례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항공 보안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공항 보안 검색이 체계적이지 않아서 납치범들이 무기를 반입할 수 있었지만, 이후 전 세계 공항에서 보안 검색이 강화되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 '굿뉴스'가 제작되어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습니다. 2021년 SBS 예능 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에서도 이 사건을 상세히 다루며 채희석 관제사의 증언을 방송 최초로 공개하여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요도호 사건은 단순한 항공기 납치 사건을 넘어서 냉전 시대의 이념 대립, 개인의 희생과 헌신, 그리고 역사의 진실이 은폐되는 과정을 모두 담고 있는 복합적인 사건입니다. 51년이 지난 지금도 이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특히 진짜 영웅들이 오히려 침묵을 강요당하고 불이익을 받는 현실은 권력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채희석 관제사가 2021년 방송을 통해 "이제는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이 사건을 재조명하는 의미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군파와 '내일의 죠' - 세대의 아이콘
적군파가 납치 사건을 일으키기 전날 발표한 성명서의 마지막 문구였던 "우리들은 내일의 죠다"라는 선언은 당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내일의 죠'는 치바 테츠야가 그린 권투 만화로, 1968년부터 1973년까지 연재되며 일본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작품입니다.
주인공 야부키 죠는 도쿄 빈민가 출신으로 권투를 통해 성장해가는 청년의 모습을 그렸는데, 기성세대에 반항하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그의 모습은 당시 젊은 세대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적군파는 이러한 죠의 이미지를 자신들의 혁명적 행동과 동일시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내일의 죠'의 팬들에게 이는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되었습니다. 순수한 스포츠 정신과 개인의 성장을 그린 작품이 폭력적인 테러 행위의 상징으로 악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작품을 사랑하는 많은 팬들은 적군파의 이러한 주장에 강한 반감을 표시했습니다.
국제 외교 무대의 복잡한 이해관계
요도호 사건은 단순히 일본과 한국, 북한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는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도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당시는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였고, 동북아시아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최전선이었습니다.
미국은 요도호에 탑승한 자국민 2명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했습니다. 만약 이들이 북한으로 가게 된다면 적대국의 국민으로서 가혹한 대우를 받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자국민 보호와 동시에 전례 없는 항공기 납치 사건에 대한 대응책 마련에 고심했습니다.
북한은 처음에는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승객과 승무원을 즉시 돌려보내겠다고 발표했지만, 막상 요도호가 도착하자 "상황이 바뀌었다"며 입장을 번복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지만, 결국 북한은 적군파의 망명을 허용하는 대신 인질들을 풀어주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습니다.
한국 정부는 전년도에 발생한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의 악몽이 재현될까 우려했습니다. 1969년 12월 11일 강릉에서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여객기가 북한에 납치되어 승무원 4명이 억류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요도호를 절대 북한으로 보낼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항공 보안의 혁명적 변화
요도호 사건 이전까지 항공 보안은 매우 허술한 수준이었습니다. 승객들은 별다른 검색 없이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고, 적군파가 일본도와 권총, 폭탄을 기내에 반입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허술한 보안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납치범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 중 상당수는 장난감이나 모조품이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져 더욱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전 세계 공항에서는 금속탐지기 설치와 수하물 검색이 의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승객들의 신원 확인 절차도 강화되었고, 기내 보안요원 배치도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경우 1971년부터 공항 보안 검색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고, 일본도 같은 해 항공보안법을 제정하여 체계적인 보안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항공기 납치 사건에 대한 국제적 공조 체계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었습니다. 국제민간항공기구(ICAO)는 항공기 납치에 대한 각국의 공동 대응 방안을 마련하기 시작했고, 헤이그 협약(1970년)과 몬트리올 협약(1971년) 등 국제 협약이 체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야마무라 신지로 차관의 운명
스스로 인질이 되어 130명의 생명을 구한 야마무라 신지로 차관은 일본으로 귀국한 후 국민적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는 평생 까임방지권을 얻었다고 할 수 있었는데, 이후 농림수산성 장관, 운수부 장관을 역임하며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했습니다. 출마하는 선거마다 당선되었고, 중의원 예산위원까지 지내며 일본 정계의 중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비극적이었습니다. 1992년, 외교사절로 북한을 재방문하기 하루 전, 그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차녀에게 칼에 찔려 사망했습니다. 평소 아버지의 일을 잘 도왔고 둘째 딸을 후계자로 삼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기에 아무도 그녀의 정신 이상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합니다. 130명의 생명을 구했던 영웅이 자신의 딸에게 생을 마감하게 된 아이러니한 운명이었습니다.
이시다 신지 기장의 침착한 대응
요도호의 기장이었던 이시다 신지는 1만 시간 이상의 비행 경험을 가진 베테랑 조종사였습니다. 그는 사건 발생 직후부터 침착함을 잃지 않고 납치범들을 상대했습니다. 연료가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선이라 북한까지 갈 연료가 없다"며 후쿠오카 착륙을 관철시킨 것이 첫 번째 기지였습니다.
김포공항에 착륙한 후에도 그는 납치범들과 당국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김포공항에서 평양으로 가는 마지막 비행에서는 야간 비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림 비행장에 안전하게 착륙시키는 기량을 보여주었습니다. 미림 비행장에는 야간 항공등화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육안으로만 착륙해야 하는 극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야간 특공 항공대 경험을 살려 완벽하게 착륙을 성공시켰습니다.
일본으로 귀국한 후 그는 기자회견에서 "일본 정부로부터 어떠한 지시도 받지 못했다"고 밝혔습니다. 조종사는 오직 승객의 안전만을 생각하며 자신의 판단으로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프로페셔널한 자세는 일본 항공업계의 모범이 되었고, 그 역시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받았습니다.
현대사에서의 재평가와 문화 콘텐츠화
반세기가 지난 지금, 요도호 사건은 다양한 관점에서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2021년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이 사건을 다루며 채희석 관제사의 증언을 방송 최초로 공개한 것은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시즌2 3회로 방영된 '우리들은 내일의 조 : 사상초유 더블하이재킹' 편은 많은 시청자들의 관심을 받았고, 역사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25년에는 넷플릭스 영화 '굿뉴스'가 요도호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되어 다시 한번 주목받았습니다. 설경구 주연의 이 영화는 김포공항을 평양으로 위장한 기상천외한 작전을 블랙코미디로 풀어냈습니다. 영화는 상당 부분 실제 사건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일부 인물과 상황은 창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 콘텐츠화는 과거의 사건을 현대인들에게 새롭게 전달하고, 잊혀져가는 역사를 기억하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채희석 관제사와 같은 숨은 영웅들의 이야기가 조명받게 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요도호 사건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국가의 명분과 개인의 희생, 역사의 진실과 권력의 은폐, 그리고 진정한 영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들 말입니다. 51년이 지난 지금도 이 사건이 계속해서 회자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보편적 주제들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