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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광 : 조선시대 얼자 출신으로 다섯 임금을 섬기며 두 번이나 일등공신에 오른 풍운의 정치가

by jisikRecipe 2025. 10. 25.

유자광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정치가로, 서얼 중에서도 가장 낮은 신분인 얼자 출신으로 태어나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다섯 임금을 섬기며 두 번이나 일등공신에 책봉된 파란만장한 인물입니다. 그는 조선시대 내내 간신의 대명사로 비판받았지만, 동시에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최고 권력층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도 평가받습니다.

출생과 초기 생애

유자광은 1439년(세종 21년) 전라도 남원에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영광이고, 자는 우후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경주부윤을 지낸 양반 유규였으나, 어머니는 천민 신분의 첩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유자광은 서자도 아닌 얼자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서얼은 양인 첩의 자손을 의미하고, 얼은 천인 첩의 자손을 의미했습니다. 얼자는 서얼 중에서도 가장 낮은 신분으로, 양반의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가정에서 천하게 여겨져 목소리를 낼 수 없었고 재산 상속권도 갖지 못했으며 관직에 등용되기도 극히 어려웠습니다. 야사에 따르면 유규가 백호 꿈을 꾼 뒤 부인과 동침하려 했다가 거절당하자 부인의 몸종과 동침하여 유자광이 태어났다고 전해집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유자광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부정적입니다. "어려서 무뢰자가 되어 장기와 바둑을 두고 재물을 다투기도 했으며 새벽이나 밤에 떠돌아다니며 길가에서 여자를 만나면 끌어다가 음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아버지 유규는 그의 소출이 미천한 데다가 방종하고 패악함이 심하여 여러 번 매질하였으며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은 사후 그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작성된 것으로, 실제로는 가문의 견제를 피해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유자광은 이후 무예에 일가견이 있어 경복궁 건춘문을 지키는 갑사가 되었습니다. 갑사는 왕실의 호위병으로 직업군인이었습니다.

이시애의 난과 세조의 총애

1467년(세조 13년) 함길도에서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이 난은 세조의 중앙집권 정책에 반발하여 일어난 반란이었습니다. 당시 하번하여 고향 남원에 머무르고 있던 유자광은 이 소식을 듣고 즉시 세조에게 상소를 올려 자진하여 출전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세조는 유자광의 상소를 읽고 "이 글은 내 뜻에 매우 합당한 진실로 기특한 재목이다. 내가 장차 임용하여서 그 옳은 것을 시행하라"고 하며 크게 기뻐했습니다. 다음날 세조는 유자광을 궁으로 불러들여 직접 무예를 선보이게 했고, 이를 보고 크게 마음에 들어하여 연락관에 임명하여 남이의 휘하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유자광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고, 이어진 건주여진 이만주 토벌전에서도 공을 세웠습니다. 일부 기록에서는 이만주의 수급을 벤 장수가 유자광이라는 다산 정약용의 기록도 있습니다. 이러한 공로로 유자광은 적개공신 2등에 녹훈되었습니다.

세조의 유자광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시애의 난 이후로 세조에게 큰 총애를 받아 벼슬이 정5품인 병조정랑에까지 이르렀는데, 모든 과정이 단 3개월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유자광은 서얼 출신으로 조선 최초로 육조의 정랑에 오른 인물이 되었습니다.

1468년 세조는 유자광으로 하여금 온양온천에서 별시 문과를 치르게 하였습니다. 과거를 본다는 것은 양반 자격을 준다는 의미와 같았는데, 이전에는 편법으로 양반에 들게 해줬다면 이번에는 정식으로 준 것입니다. 신숙주는 유자광의 답안을 "고어를 전용하고 문법이 소홀하다"는 이유로 낙방시켰지만, 세조가 "묻는 본의에 어그러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자광을 장원 급제로 삼았습니다.

조정에서는 "불가합니다"라는 상소가 세조에게 빗발쳤지만 세조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세조는 "이런 말로써 말하는 자는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고 화를 내며 반발을 모조리 잠재웠습니다. 이처럼 승승장구하던 유자광은 세조가 사망하고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또 다른 기회를 맞이하게 됩니다.

남이의 옥과 익대공신 책봉

1468년(예종 즉위년) 10월 24일, 예종이 즉위한 지 한 달 보름만에 유자광이 입궐하여 "의산군 남이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했습니다. 신진 무신 세력의 대표주자였던 남이는 세조 시절부터 공신 세력들을 견제해오던 이들에게 큰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남이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유자광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로 결심하고 그와 접촉하여 여러 불온한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러나 유자광은 오히려 공신 세력에 붙어서 남이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였습니다. 유자광은 남이가 자신을 찾아와 정변을 일으켜 한명회, 신숙주를 비롯한 대신들을 제거하자고 설득했다고 진술했습니다. 남이는 "혜성이 나타난 것은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것을 펼칠 징조다"라는 말을 했는데, 유자광이 이 말을 듣고 남이가 반란을 꾀했다고 모함한 것입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남이, 강순, 문효량, 변영수, 변자의, 오치권 등을 비롯한 신진 무신 세력은 역모 혐의를 받아 대부분 죽음을 면치 못하였으며 25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유자광은 역모를 막은 공을 인정받아 익대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남이가 살던 집을 받고 무령군 자헌대부에 봉해졌습니다.

예종의 신임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의 실세였던 공신 세력의 눈에 띄게 되어 정치적인 입지를 더욱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역모 사건으로 인식되었지만, 이후 일부 야사에서는 유자광의 모함으로 날조된 옥사라고 규정하고 남이를 젊은 나이에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인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성종 시대의 정치 활동

예종이 즉위한 지 14개월 만에 사망하고 성종이 즉위했습니다. 유자광은 성종 1년에 자신의 부하였던 박성간이 자신이 남이처럼 반역을 계획했다고 고변하여 고문과 심문을 당하는 일이 있었는데, 단 하루만에 수렴청정을 하던 정희왕후가 유자광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석방을 지시했고 오히려 박성간이 무고를 저지른 것이 확인되자 참형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는 유자광이 세조와 정희왕후의 총애를 얼마나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1476년(성종 7년) 유자광은 성종의 친정을 반대하는 한명회를 탄핵하는 데 공을 세웠습니다. 이로 인해 성종에게도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종은 대신들의 반대를 굴복시키고 유자광을 궁궐을 방위하는 금군의 최고책임자인 오위도총관에 임명했습니다.

1491년(성종 22년) 유자광은 황해도 관찰사로 파견되었습니다. 이보다 앞서 처가가 있는 함양군으로 놀러 갔다가 시를 지어 현판하게 하였는데, 그 뒤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그 현판을 떼어 불태워버리자, 이때부터 김종직에게 원한을 품었습니다. 이 원한은 훗날 무오사화의 불씨가 됩니다.

무오사화의 주역

1498년(연산군 4년) 7월 1일, 유자광은 김일손의 사초에 세조의 흠이 될 만한 행적을 여러 가지 적어놓았다며 문제 삼았습니다. 연산군은 당장 김일손의 사초를 열람하겠다며 거두어갔고, 그곳에는 '사육신이 절개를 지키고 죽었다', '세조가 큰아들인 덕종의 후궁을 취하려 했다', '단종의 관이 바닷가에 버려졌다'는 등의 충격적인 내용들이 있었습니다.

유자광은 여기에 더하여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지었다는 「조의제문」을 연산군에게 직접 바쳤습니다. 이 글은 초나라 의제가 삼촌에게 죽임을 당한 일을 위로한다는 내용으로, 어려운 글이었지만 유자광이 친히 주석까지 달아 이해하기 쉽게 주석을 달아 바쳤다고 합니다. 이것도 결국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죽인 것을 비방하는 내용으로 이해되어 이미 죽고 없는 김종직은 부관참시의 형을 당하였습니다.

무오사화는 사림파 중심 인물인 김종직 문하의 사관 김일손이 사초에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었고, 이것이 발각되어 김종직이 부관참시되고 김일손을 비롯한 많은 사림파 인사들이 화를 입은 사건입니다. 이극돈은 사림파와 자주 대립했는데, 이 일을 계기로 사림파를 숙청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문집에 실린 「조의제문」을 유자광한테 전해줬습니다.

유자광도 「조의제문」의 엄청난 파괴력을 느꼈고, 마침 함양의 학사루에 걸어둔 자신의 시를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하자마자 떼어내어 불살라 버린 일로 김종직에게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던지라, 어느 날 새벽에 몰래 연산군을 찾아가 이를 고해바쳤습니다. 무오사화 이후 유자광은 연산군의 신임을 얻어서 그 이후 어떠한 비판도 그를 넘어뜨리지 못했습니다. 유자광은 1501년 오위도총관이 되었으며, 이때 그의 나이 60세였습니다.

갑자사화와 유자광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가 일어났습니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의 사사 사건을 알게 되면서 관련자들을 대거 숙청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서 유자광은 주역이 아니었고, 오히려 피해자가 될 뻔했습니다.

유자광과 이극균은 친분이 있었는데, 이극균이 폐비 윤씨의 사사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자 유자광도 연루될 뻔했습니다. 그러나 유자광은 이전의 공으로 화를 면했습니다. 심지어 갑자사화 중에는 연산군이 "너는 뭐했냐?"라고 죽일 듯 화를 내며 옥에까지 가뒀다가 풀어주기도 했습니다.

갑자사화는 연산군 특유의 폭력성과 잔인성을 드러내며 사림, 훈구 가릴 것 없이 신하들을 싹 쓸어버린 숙청으로, 사림파가 화를 입었다는 뜻의 사화라는 명칭처럼 사림의 피해가 컸지만, 훈구파도 무사하지는 못했습니다. 윤필상, 이세좌, 이극균, 성준 등 화를 당한 사람들이 많고, 부관참시를 당한 한명회, 한치형, 정창손, 심회 등도 역시 훈구파입니다.

중종반정과 정국공신

1506년(중종 1년) 중종반정이 일어났습니다. 반정의 주도자들 중 성희안은 문신이었고 박원종은 무술은 뛰어났지만 실전 경험이 없었기에 이시애의 난 토벌과 여진 정벌 등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유자광은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유자광은 안 그래도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반정 세력이 적극적으로 설득하자 결국 반정 세력에 가담했습니다.

해동잡록의 기록에 따르면 유자광이 중종반정에 합류할 때 기름종이를 많이 가지고 가서 반정군을 지휘할 장수들에게 종이를 잘라 표식을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유자광은 궁궐 문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진을 쳤고, 그 공로로 정국공신 1등에 책봉되었습니다. 이로써 유자광은 익대공신 1등, 정국공신 1등으로 두 번이나 1등 공신에 책봉된 유일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중종반정에도 앞장선 덕에 그는 다시 공신이 되어 녹을 받아먹으면서 어느 정도 큰소리를 쳤으나, 연산군의 축출 이후 조정에 대거 진출한 사림들이 유자광의 철천지원수들인데다 중종과 반정공신들도 그를 불신했기에 그 위세도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얼마 뒤 그의 품계를 '대광'으로 올리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대간의 반대로 실패했습니다.

유배와 최후

중종 2년(1507년) 윤정월에 조광보라는 인물이 핵심 대신인 박원종, 노공필 등을 죽이려고 한 사건이 발각되었는데, 그는 국문을 받으면서 유자광이 무오사화를 일으킨 소인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유자광은 "김종직의 남은 무리가 비밀히 중상하려 하니 마음놓고 서울에 있을 수 없다"면서 시골로 물러가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대간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두 달 가까이 탄핵을 지속했고, 마침내 유자광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중종은 일단 유자광을 파직시켰지만, 대간은 만족하지 않았고, 갑자사화도 그가 주모했다는 죄목까지 추가했습니다. 결국 당시의 가장 핵심적인 실세인 좌의정 박원종도 대간에 동의함으로써 유자광은 두 번째 유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유자광은 처음에는 평해로 유배되고 정국공신에서도 삭훈되었으며, 자손들도 멀리 귀양갔습니다. 당시의 사평은 "유자광은 무오년의 옥사를 주창하고 다시 갑자년의 사화를 일으켜 사대부가 다 죽고 종사가 거의 뒤집어질 뻔했는데도 목숨을 보전해 천명대로 살게 되었으니, 유배지에서 죽더라도 나라를 그르친 자의 경계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평가했습니다.

이 사평대로 유자광은 5년 뒤인 1512년(중종 7년) 6월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73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유자광은 조선왕조 내내 죄인의 신분으로 남았다가 무려 400여 년이 지난 1908년 순종 때 사면과 복권이 이뤄졌습니다.

유자광의 능력과 재능

유자광은 몸이 날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할 뿐 아니라 문장과 학식에도 뛰어났습니다. 날래고 힘이 세었으며 높은 나무를 원숭이와 같이 잘 탔다고 합니다. 또한 탁월한 두뇌와 날카로운 정세판단 그리고 뛰어난 무예 솜씨와 함께 글과 학문에도 능했습니다.

유자광은 중추부지사 유규의 서자로 태어났으며, 함양호장을 지낸 박치인의 딸과 결혼하여 유방과 유진 등을 낳았습니다. 그는 조선조에서 처음으로 육조의 정랑으로 임명되었으며 군권을 지휘하는 오위도총관을 역임했고 또한 두 번의 공신 첩지를 받았습니다. 명예로는 대광보국숭록대부에 무령부원군의 봉작까지 받은 그야말로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역사적 평가와 재평가

유자광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까지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내내 그는 간신의 대명사로 비판받았습니다. 특히 사림파가 집권한 이후 유자광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조선왕조 내내 용서받을 수 없는 간신으로 낙인찍혔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은 유자광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서얼 차별이 본격화되던 15세기 후반, 유자광은 천민 출신 첩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탁월한 문장 실력을 갖춘데다 각종 무예까지 능했음에도, 그는 출생 배경 하나 때문에 중앙 정계 진출을 시도할 때마다 번번이 시련을 겪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