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사의 생애와 동국진체
이광사는 1705년부터 1777년까지 조선 후기를 살았던 문신이자 서예가, 양명학자로서 한국 서예사와 사상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입니다.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 또는 수북(壽北)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시대 제2대 임금 정종의 서얼 왕자인 덕천군 이후생의 후손이며, 예조판서를 지낸 이진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중국 서체의 범주에서 벗어나 조선만의 독특한 서체인 원교체를 완성하였으며, 이는 조선화되었다는 의미에서 동국진체(東國眞體)라고 불립니다.
소론 가문의 몰락과 정치적 시련
이광사가 살았던 시대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그의 가문은 소론 명문가였으나, 경종 1년인 1721년 그의 나이 17세 때 부친 이진검이 노론 4대신을 탄핵하다가 경상도 밀양으로 유배되었고, 이후 강진으로 다시 유배되었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큰아버지 이진유 역시 신임옥사 당시 김일경과 손을 잡고 노론을 탄핵했다가 영조가 즉위하자 중앙에서 먼 지역에 안치되었고, 문초를 받던 중 옥사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이광사의 가문은 몰락하게 되었고, 그 자신도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고 야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화도에서의 양명학 수학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소론이 정권에서 완전히 밀려난 이후, 이광사는 출사를 단념하고 근 20년간을 야인으로 지내며 학문과 예술에만 전념하였습니다. 그는 1732년 28세의 나이에 강화도로 들어가 하곡 정제두에게 양명학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정제두는 주자학 일색이던 조선 사회에서 양명학을 연구하고 발전시킨 인물로, 강화도를 중심으로 강화학파를 형성한 학자였습니다. 이광사는 정제두에게 여러 달 머물며 수학하면서 양명학의 깊은 가르침을 받았으며, 이는 그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1736년 정제두가 세상을 떠나자 이광사는 스승의 상을 당하여 복을 입을 정도로 깊은 사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윤순에게 배운 서예와 동국진체의 계승
서예 방면에서 이광사는 백하 윤순의 문하에서 필법을 익혔습니다. 윤순은 당시 조선의 대표적인 서예가로, 동국진체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었습니다. 동국진체는 원래 옥동 이서가 자주적 운동의 일환으로 창조한 서체로, 전통적인 진체를 바탕으로 미법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여 만든 조선 고유의 서체입니다. 이것이 공재 윤두서를 거쳐 윤순에게 전해졌고, 윤순의 서법을 계승한 이광사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이광사는 왕희지의 서첩들이 오래되고 변모를 거듭하여 본색을 알아보기 어렵다고 생각했으며, 전서와 예서를 통해 심획을 얻은 후 다시 왕희지의 서법으로 바르게 나갈 수 있다고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조선 고유의 동국진체가 완성되었습니다.
원교체의 완성과 특징
이광사가 40세를 전후한 시기에 그의 서도는 날로 진보하여 독특한 원교체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원교체는 원만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것이 특징이며, 개성적이면서 민족적 색채가 짙습니다. 획이 삐쭉 마르고 기교가 많이 들어간 것 같지만 화강암의 골기가 느껴지는 강인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서체는 조선 말기까지 크게 유행하여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추사 김정희와의 일화
흥미로운 일화로, 추사 김정희는 처음에는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글씨라며 원교체를 강하게 비판했지만, 9년의 제주도 유배생활을 거친 후 대흥사에 들러 자신이 잘못 보았다고 인정하며 원교 이광사의 현판 글씨를 다시 걸어줄 것을 정중히 부탁했다고 합니다. 이는 원교체가 지닌 예술적 가치와 독창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나주 괘서 사건과 함경도 유배
그러나 이광사의 삶에 큰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1755년 영조 31년, 그의 나이 51세 때 나주 괘서 사건에 연루되어 이진유의 조카라는 이유로 연좌되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제주에 유배될 예정이었으나, 제주가 인척이 있는 해남과 가깝다는 이유로 함경도 부령으로 이배되었습니다. 이광사가 옥중에서 사사되었다는 소문이 돌자, 이 소식을 들은 부인 문화 류씨가 자결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부령에서 그는 7년간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지역의 청년들에게 서예와 학문을 가르쳤습니다.
신지도 유배와 생의 마지막
1762년 영조 38년, 그의 나이 58세 때 부령에서 문인들에게 글씨와 글을 가르쳐 세상을 비방하고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진도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러나 진도가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다는 이유로 1년 후 전라남도 신지도(현재의 완도군 신지면 금곡리)로 다시 이배되었습니다. 신지도는 바다에 둘러싸인 절해고도로, 외부와의 접촉이 거의 불가능한 곳이었습니다. 이광사는 이곳에서 15년간 유배 생활을 하며 1777년 8월 26일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습니다. 함경도 부령에 머물던 시절의 제자들이 내려와 스승의 유해를 서울까지 옮겼고, 그 이듬해 2월 아들 형제가 선조들이 묻혀 있는 경기도 장단 송남에 어머니 류씨와 동분합장하였습니다.
유배지에서 완성한 서결
유배지에서의 삶이 고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광사는 학문과 예술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764년 59세의 나이로 신지도에서 서예 이론서인 『서결(書訣)』 전편을 완성했습니다. 이 책은 건(乾), 곤(坤), 부(附) 3첩으로 구성되었으며, 곤첩의 마지막에는 큰아들 이긍익에게 써서 준다는 글이 적혀 있습니다. 『서결』의 전편은 주로 서예의 기본적인 필법에 대한 내용으로서 이론과 평론을 겸했던 이광사의 면모와 필력을 잘 보여주는 서예 작품입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매우 희귀한 서예 이론서이자 우리나라 서예 이론 체계를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입니다. 1768년 63세에는 『서결』 후편을 차남 이영익에게 대필로 완성했습니다.
서결에 담긴 서예 이론과 예술관
『서결』에서 이광사는 당송 이래의 글씨에서 벗어나 위진의 옛 법도로 돌아갈 것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는 옛 법서의 임서를 주장하는 한편, 위부인과 왕희지의 옛 서결을 간추려서 용필법과 운획법을 상세히 기술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고려 말 이후 적체되었던 우리나라 서법의 병폐를 막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했습니다. 그는 "예를 들어 사람 마음속에 일어나는 사랑, 기쁨, 노여움, 상쾌함, 답답함, 속임, 뉘우침 따위 감정이 순간에도 변하는 것이므로 이게 바로 조화이고 자연이니 문장도 이와 같은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치 자연의 조화가 사물에 따라 형태를 이루되 처음부터 일정한 체제가 없음과 같다"는 것이 그의 예술론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자연스러움과 진정성을 중시하는 양명학적 사고와도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서예를 단순한 기법이 아닌 정신의 표현으로 본 그의 예술관을 잘 보여줍니다.
시서화 삼절의 예술가
이광사는 시, 서, 화에 모두 능하였습니다. 그림에서는 산수와 인물, 초충을 잘 그렸으며, 인물에서는 남송원체화풍의 고식을 따랐으나 산수는 새롭게 유입된 오파의 남종화법을 토대로 소박하면서 꾸밈없는 문인 취향의 화풍을 보였습니다. 대표작으로는 『행서4언시』(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1746년에 오대의 인물화가 왕제한을 임모하여 그린 『고승간화도』(간송미술관 소장), 『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있습니다. 또한 『잉어도』는 이광사가 잉어를 그렸으나 머리와 눈만 그리고 마치지 못한 것을 20년 후 아들 이영익이 이어 그린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이 작품은 부자가 세대를 넘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보물로 지정된 서예 작품들
서예 작품으로는 이광사 필 서결이 2018년 보물 제1969호로 지정되었으며, 이광사 행서 화기가 보물 제1677-1호, 이광사 필적 원교법첩이 보물 제1677-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의 현판 글씨는 전라남도 해남군 대흥사의 '침계루'와 '대웅보전', 강진군 백련사의 '만경루', 구례군 천은사의 '지리산 천은사' 등 여러 사찰에 남아 있어 그의 뛰어난 서예 실력을 오늘날까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대흥사 대웅보전의 현판 글씨는 앞서 언급한 추사 김정희와의 일화로 더욱 유명해졌으며, 원교체의 예술성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유배지에서 그려진 초상화
이광사의 초상화는 화원 신한평이 1775년에 그린 작품으로, 이광사의 70세 때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신한평은 어진도사에도 참여했던 뛰어난 초상화가였으며, 유배지를 찾아가 그린 이 초상화는 몇 점 남아있지 않은 유배지 초상화이자 신한평의 작품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초상화로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는 화제가 쓰여 있어 제작 경위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초상화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보물 제148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초상화 속 이광사의 모습은 유배지에서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고 학자다운 품격을 간직하고 있어 그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원교집선과 학문 연구
이광사의 저술로는 『원교집선』이 있습니다. 이 책은 권1에 단군 이래의 역사를 읊은 『동국악부』 30수가 수록되어 있고, 권2에는 함경북도 부령에 유배되었을 때의 작품들이, 권3에는 신지도에 이배된 이후의 작품들이 실려 있습니다. 권3에 수록된 『기속』은 유배지인 신지도의 풍속을 그린 것으로 당시 지역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권8에는 『오음정서』라는 언어에 대한 과학적 연구서가 포함되어 있는데, 사람의 성음이 후(喉), 설(舌), 치(齒), 순(脣), 아(牙) 등 다섯 곳에서 나오는 까닭에 오음이라 하며, 오행과도 자연적으로 합치된다고 설명하며 오음의 전개를 구체적으로 해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는 조선시대 음운학 연구에서도 주목할 만한 업적으로 평가됩니다.
실학자 이긍익과의 부자 관계
이광사의 장남은 실학자로 유명한 연려실 이긍익입니다. 이긍익은 아버지의 학문적 전통을 이어받아 조선 후기 실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는 특히 『연려실기술』이라는 방대한 역사서를 저술하여 조선시대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남겼습니다. 이광사는 유배지에서도 아들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학문적 가르침을 이어갔으며, 『서결』을 장남 이긍익과 차남 이영익에게 각각 써서 준 것에서 그의 교육열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은 이긍익이 실학자로 성장한 것은 이광사의 교육이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강화학파의 핵심 인물
강화학파의 형성과 발전에서 이광사가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합니다. 강화학파는 정제두를 중심으로 강화도에서 형성된 양명학파로, 주자학 일색이던 조선 사회에서 독특한 학문적 경향을 보였습니다. 정제두의 학문은 그의 아들 정후일을 거쳐 사위 신대우와 외손자 신작에게로 계승되었고, 정제두에게 20년간 사사한 이광명의 학문은 그의 아들 이충익에게로 이어졌습니다. 이광사의 학문은 그의 아들 이긍익에게로 계승되었으며, 이들 전주이씨 덕천군파는 대부분 소론계에 속했습니다. 강화학파의 양명학은 이충익의 손자 이시원을 거쳐 19세기 말의 이건창으로 계승되었으며, 한말 일제시대의 국학자인 박은식과 정인보도 주로 양명학을 연구했습니다. 이처럼 이광사는 강화학파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민족 문화의 자주성을 추구한 동국진체
이광사가 완성한 동국진체는 단순히 서예 기법의 발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독자적인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습니다. 중국 서체의 모방에서 벗어나 조선만의 독특한 미감을 구현하려 했던 그의 노력은 민족 문화의 자주성을 추구한 문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교체는 기교와 자연스러움, 강인함과 부드러움이 조화를 이루며 조선인의 미적 감각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중국 중심의 서예관에서 벗어나 조선의 독자적 서예 전통을 확립하고자 했던 이광사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입니다.
역경 속에서 꽃핀 예술 정신
이광사의 삶은 정치적 박해와 유배라는 고난 속에서도 학문과 예술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정진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한 조선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는 20여 년의 유배 생활 동안에도 제자들을 가르치고, 이론서를 저술하며, 서예와 회화 작품을 남기는 등 왕성한 창작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절해고도의 신지도에서 보낸 15년의 세월은 그에게 고독과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예술 세계를 더욱 깊이 있게 완성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부인의 죽음이라는 개인적 비극과 가족과의 이별, 그리고 극도로 제한된 물질적 환경 속에서도 그는 예술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광사의 유산과 현대적 의미
이광사의 묘소는 경기도 장단 송남에 있으나, 현재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DMZ)의 수풀 속에 있어 사람들의 발길을 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서예 작품과 이론서, 그리고 동국진체라는 조선 고유의 서체는 오늘날까지 한국 서예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의 학문적 유산은 후대 학자들에게 계승되어 조선 후기 실학과 양명학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전국의 사찰에 남아있는 그의 현판 글씨들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으며, 박물관에 소장된 그의 작품들은 연구자들과 예술 애호가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광사는 단순한 서예가나 학자를 넘어서, 시대적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과 예술 세계를 지켜낸 문인이자 사상가였습니다. 그의 생애와 업적은 역경 속에서도 문화와 학문의 가치를 지키고 발전시킨 조선 지식인의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의 작품들이 보물로 지정되고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은 그의 예술적 성취에 대한 정당한 평가이며, 동국진체는 한국 서예의 독자성을 확립한 중요한 유산으로 계속 연구되고 있습니다. 이광사의 삶과 예술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 한 예술가의 고결한 정신을 보여주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과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