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긍익의 생애와 출생 배경
이긍익(李肯翊)은 1736년(영조 12)에 한성부에서 출생하여 1806년(순조 6)에 사망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역사학자입니다. 그의 자(字)는 장경(長卿)이며, 호(號)는 완산(完山) 또는 연려실(燃藜室)입니다. 본관은 전주(全州)로, 조선의 제2대 임금인 정종(定宗)의 서자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의 11대손으로 왕실의 후예이기도 합니다.
이긍익은 양명학자이자 뛰어난 서예가로 알려진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이광사는 당대에 독특한 서체인 원교체(圓嶠體)를 창안한 명필로 유명했으며, 시·서·화에 모두 능통한 문인이었습니다. 이긍익은 어려서부터 학식이 깊은 아버지에게서 성리학과 양명학을 배우며 학문의 기초를 다졌으며, 특히 글씨도 아버지를 닮아 뛰어났습니다. 그는 13세 무렵부터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평생의 학문적 방향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가문이 겪은 정치적 시련
이긍익의 집안은 전통적으로 소론(少論)에 속한 정치 세력이었으며, 소론 강경파의 중심 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입장은 가문에 큰 화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백조부(伯祖父)인 이진유(李眞儒)는 이조판서 재직 당시 경종이 승하한 사실을 청나라에 보고하기 위하여 고부부사(告訃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경종을 옹호하다가 영조의 역적으로 몰려 옥사하였습니다. 조부 이진검(李眞儉)은 1721년부터 1722년에 걸쳐 일어난 신임사화(辛壬士禍)에 앞장섰다가 영조의 즉위 이후에 처형당하는 비극을 맞이하였습니다.
신임사화는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에서 소론이 일시적으로 실권을 잡았으나, 영조 즉위 후 노론이 반격하여 소론을 대대적으로 숙청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화로 인해 이긍익의 가문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으며, 이후에도 끊임없이 정치적 박해를 받았습니다. 1728년(영조 4)에는 이인좌(李麟佐)의 난에도 연루되어 가문이 다시 한번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가문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긍익의 나이 20세 때인 1755년(영조 31)에 아버지 이광사가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에 연루되어 함경도 부령(富寧)으로 유배되었고, 이후 적소(謫所)를 신지도(薪智島)로 옮겨 그곳에서 1777년(정조 1)에 사망하였습니다. 남편의 투옥과 유배에 충격을 받은 이긍익의 어머니는 42세의 나이로 자결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정적 불행과 당쟁의 소용돌이는 이긍익의 인생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평생 야인으로 살며 학문에 전념
거듭된 가문의 화와 정치적 박해를 목격한 이긍익은 과거를 포기하고 평생을 야인(野人)으로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학문 연구와 저술에만 몰두하는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역경과 빈곤 속에서도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매진한 것은 당쟁으로 인한 가정적 불운을 학문적 성취로 승화시키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이긍익의 학문적 배경은 강화학파(江華學派)에 속합니다. 강화학파는 1709년(숙종 35) 정제두(鄭齊斗)가 강화도 하곡(霞谷)에 자리 잡은 후 형성된 학풍으로, 조선의 주류 사상인 성리학과는 달리 마음속에서 사물의 이치를 파악하고 실천을 강조하는 양명학(陽明學)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긍익의 가문은 아버지 때부터 양명학을 받아들여 강화학파의 일원이 되었으며, 정제두의 제자인 이광명(李光明)과 종형제 관계였던 이광사를 통해 양명학의 전통을 계승하였습니다.
강화학파는 양명학을 넘어서서 다양한 학문을 널리 섭렵하려는 박학풍(博學風)과 절충적 학문 경향으로 실천을 강조하는 실리적 학풍이 특징이었습니다. 이러한 학풍 속에서 이긍익은 실학을 연구한 고증학파 학자로 성장하였으며, 특히 조선사 연구에 있어서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증학적 방법론을 통해 역사 자료를 철저히 검증하고 실증적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연려실기술의 저술과 의미
이긍익의 평생 업적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저술로 집약됩니다. 이 책은 전59권에 달하는 방대한 조선시대 역사서로, 조선 왕조 야사(野史)의 금자탑이라고 평가받습니다. 제목의 '연려실'은 중국 전한(前漢)의 유향(劉向)이 옛 글을 교정할 때 태일선인(太一仙人)이 푸른 명아주 지팡이(청려장)에 불을 붙여서 비추어 주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이긍익의 부친 이광사가 아들의 서재를 위하여 벽에 손수 '연려실'이라는 편액을 휘호로 써 주었으며, 이후 이를 저술의 제목으로까지 삼게 되었습니다.
이긍익은 아버지가 유배되었던 신지도에서 42세 때부터 『연려실기술』을 집필하기 시작하여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30년에 걸쳐 편찬하였습니다. 부친의 사후에도 그 유배지였던 신지도로 내려가 고인의 거처에 '연려실' 편액을 새겨 단 작업실을 내고 불철주야 집필에 몰두하였습니다. 42세 이전에 일단 초고 작성이 완료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후 계속 내용을 보충하였으며 이 작업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연려실기술』은 형식상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로, 야사류의 기록을 중심으로 편찬되었습니다. 기사본말체란 역사적 사건을 주제별로 처음부터 끝까지 서술하는 방식으로, 사건의 전후 맥락을 파악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총 500권 이상의 저서가 인용되었으며, 400여 가지에 달하는 야사에서 자료를 수집하여 술이부작(述而不作, 기술할 뿐 창작하지 않는다)의 원칙으로 서술되었습니다.
책의 구성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원집(原集)'은 태조부터 현종까지의 주요 사건을 엮었으며, '속집(續集)'은 이긍익의 생존 시기인 숙종대의 사건을 서술하였습니다. '별집(別集)'은 조선시대 관직, 제도, 전례, 문예, 천문, 지리, 대외 관계, 고전 등을 편목으로 나누어 연혁과 출처를 수록하였습니다. 이러한 체계적인 구성은 조선시대 정치·사회·문화 전반을 망라하는 백과사전적 성격을 띠게 하였습니다.
연려실기술의 편찬 방식과 특징
『연려실기술』의 편찬 과정에서 이긍익은 독특한 방법을 채택하였습니다. 그는 본문에 여백을 두어 새로운 자료를 발견하는 대로 수시로 기입하고 보충하는 방법을 취하였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보충하게 하여 정본을 이룩하도록 희망하였습니다. 이러한 개방적 태도는 역사 서술에 있어서 끊임없는 수정과 보완이 필요하다는 실학적 인식을 보여줍니다. 그 결과 편저자 자신의 생존 때부터 전사본(傳寫本)의 수효가 한둘이 아니었으며, 특별히 정본이 없이 여러 종류의 필사본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연려실기술』은 국가에서 주관한 정사가 아니라 개인이 저술한 역사서이지만, 자료 수집에 매우 공을 들이고 최대한 주관적인 관점을 배제함으로써 공정성과 객관성에도 신경을 쓴 사서로 평가받습니다. 이긍익은 객관적 역사관을 바탕으로 고증학적 방법을 통해 사실을 엄밀히 검증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다만 이긍익은 관직에 진출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의 1차 사료를 직접적으로 볼 수 없었고, 이 때문에 내용상의 한계가 존재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려실기술』은 조선 시대 야사(野史)의 총서로서, 개인이 저술한 저서 가운데 최고의 역사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실제 역사와는 전혀 다르거나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지만, 저자 이긍익의 서술 태도나 저술의 규모 등을 통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 번역되기 이전에는 가장 유명했던 역사서였으며, 현대의 사극 드라마나 역사 소설에서도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연려실기술에 담긴 역사관
『연려실기술』에는 고증학과 민족 주체성을 강조한 이긍익의 역사관이 뚜렷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독자적 유교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강화학파의 국학(國學)적 경향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우리 역사에 대한 주체적 이해를 높이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을 통해 조선 왕조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후대에 올바른 역사 인식을 전달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긍익의 역사 서술은 실학 정신을 토대로 기존 사서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그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원칙을 따르면서도, 자료의 선택과 배치를 통해 자신의 역사관을 드러냈습니다. 특히 당쟁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그로 인한 피해를 목격한 경험은 그의 역사 서술에 깊이 반영되었으며, 보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역사 기록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하였습니다.
이긍익의 학문적 업적과 영향
이긍익은 실학을 연구한 고증학파 학자로서 조선사 연구의 선구자입니다. 그는 강화학파의 박학풍과 실리적 학풍을 계승하여 국학, 특히 우리 역사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그의 역사 연구 방법론은 후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조선 후기 실학 사상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이긍익의 업적은 『연려실기술』 외에도 많은 책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여러 번의 유배와 가문의 화로 인하여 대부분 유실되고 『연려실기술』만이 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 권의 저술만으로도 조선 후기 역사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평가받습니다. 『연려실기술』은 1934년 계유출판사의 『조선야사전집』에 일부가 국한문체로 번역되어 나왔으며, 1966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고전국역총서 제1집으로 국역하여 A5판 12권(색인 포함)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이긍익의 양명학에 바탕한 객관적 역사관은 후대 강화학파 학자들에게 계승되어 이면백의 『해동돈사』, 이건창의 『당의통략』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그의 학문적 정신은 조선 후기를 넘어 근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역사학의 발전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서예가로서의 이긍익
이긍익은 역사가로서뿐만 아니라 서예가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이광사에게 글씨를 배웠으며, 특히나 글씨(서예)가 뛰어났다고 전해집니다. 아버지 이광사가 창안한 원교체(圓嶠體)는 획을 한번에 죽 긋지 않고 여러 번 굴려 근골을 세우는 길곡법(佶曲法)을 특징으로 하는 독특한 서체였으며, 이긍익은 이러한 가학(家學)을 계승하였습니다.
이광사는 1764년 59세에 『서결(書訣)』 전편을 저술하였고, 1768년 63세에 『서결』 후편을 차남 이영익에게 대술시켜 『원교서결(圓嶠書訣)』을 완성하였습니다. 이 서론서(書論書)는 위부인(衛夫人)의 『필진도(筆陣圖)』, 왕희지(王羲之)의 『필세론(筆勢論)』을 토대로 한 것으로, 이긍익도 이러한 서예 이론을 익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서법에 있어서 이광사 부자의 업적은 강화학파의 학문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강화학파의 전통 계승
이긍익은 강화학파의 중요한 일원으로서 정제두로부터 시작된 양명학의 전통을 계승하였습니다. 강화학파는 정제두, 정후일, 이광명, 이광사, 이긍익, 이충익으로 이어지는 학맥을 형성하였으며, 이들은 모두 정종의 아들이었던 덕천군의 후손으로 종친 출신의 소론 계열에 속하였습니다. 이광명의 종형제인 이광사의 학문은 그의 아들인 이긍익에게로 계승되었으며, 이들의 양명학은 이충익의 손자인 이시원을 거쳐 그의 후손인 19세기 말의 이건창으로 계승되었습니다.
강화학파의 학자들은 다양한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이광사는 시·서·화에 뛰어났고, 유희의 한글 연구는 『언문지(諺文志)』의 편찬으로 이어졌으며, 이긍익은 『연려실기술』로 역사학의 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학문적 성과는 강화학파의 박학풍과 실천적 학문 태도의 결과였습니다. 한말 일제 시대의 국학자인 박은식과 정인보도 주로 양명학을 연구하였으며, 강화학파의 정신을 계승하였습니다.
이긍익의 역사적 평가
이긍익은 노·소론의 당쟁 속에서 뼈아픈 가정사를 겪었지만, 자신의 불운한 환경을 원망하기보다는 역사에 대한 관심과 저술에 대한 열정으로 승화시킨 인물입니다. 그는 정치적 진출이나 사회활동에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포기하고 평생을 야인으로 생활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여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전 59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인 『연려실기술』은 그의 평생의 저작이라 할 수 있으며, 조선 시대 역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긍익의 삶은 역경을 극복하고 학문적 성취를 이룬 선비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는 가문의 불행과 정치적 박해 속에서도 학문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으며,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역사 서술을 통해 후대에 올바른 역사 인식을 전달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의 역사관과 학문 정신은 강화학파의 전통과 함께 조선 후기 실학 사상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한국 역사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오늘날 『연려실기술』은 조선시대 정치·사회·문화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로 활용되고 있으며, 학계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이긍익이 30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이 저술은 개인이 이룬 역사 연구의 금자탑으로서, 그의 학문적 열정과 역사에 대한 사명감을 잘 보여주는 불멸의 업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