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난고의 정의와 의미
이재난고(頤齋亂藁)는 조선 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이재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이 10세부터 63세로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까지 53년간에 걸쳐 작성한 방대한 기록물입니다. 이재난고는 현존하는 조선시대 개인 일기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며, 총 57책 약 500만 자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저작물은 단순한 개인 일기를 넘어서 조선 후기 사회상을 총망라한 백과전서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 "조선시대 타임캡슐"이라고도 불립니다.
황윤석과 이재난고의 역사적 배경
황윤석은 1729년(영조 5년)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에서 태어나 1791년(정조 15년)에 세상을 떠난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였습니다. 본관은 평해(平海)이고, 자는 영수(永叟), 호는 이재(頤齋)·서명산인(西溟散人)·운포주인(雲浦主人)·월송외사(越松外史) 등을 사용했습니다.
황윤석은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주를 보여 9세 때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그의 재능이 알려질 정도였습니다. 그는 "군자는 한 가지 사물이라도 알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君子恥一物不知)는 신념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아 박학다식한 학문체계를 지향했습니다. 1747년 사마시에 급제하여 익찬에 이르렀으며, 다양한 관직을 거쳤지만 대부분 단기간에 그만두고 학문 연구에 전념했습니다.
이재난고의 구성과 체재
이재난고는 일차, 월차, 년차 순으로 편책하여 적당한 두께로 분철하여 총 57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6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기록이 시작되었고, 그 전의 기록은 추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초년의 기록은 해서나 행서로 되어 있으나 24-25세 무렵부터는 거의 초서로 기록하였고, 간혹 행장, 갈명 등 신중함이 요구되는 사항의 초고와 시구만은 행서로 기록했습니다.
책에 사용된 용지는 선인들의 관례에 따라 글이 쓰인 헌 종이를 뒤집어 쓰거나 남은 자투리 종이를 이용하여 여백도 없이 빽빽하게 글씨로 가득 채운 면이 많습니다. 책마다 쓰기 시작한 연대와 끝낸 연대를 기록하고 '난고(亂藁)' 또는 '이재난고'라는 표제를 달았습니다.
이재난고의 다양한 기록 내용
이재난고의 내용은 그 다양성과 방대함에서 독보적입니다. 서술 형태를 보면 날씨부터 쓰기 시작하여 기후의 변화, 농사의 풍흉과 때로는 지진, 혜성의 상황을 적고 일식, 월식의 시각도 그때마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일식은 그 시각을 스스로 측정하여 그 측정치를 시헌력, 회회력과 대조하여 그 오차를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천문학적 관측 수준을 보여줍니다.
경제생활과 물가 기록
이재난고에는 당시의 경제상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용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할 때도 그 가격과 품질, 분량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조선 후기의 물가 변동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1759년부터 1769년까지 서울의 쌀 가격이 약 4배 상승하였고 이자율은 연 100%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주막 국밥값 3전, 고급 누비솜옷 4냥, 평민의 누비솜옷 2냥 등 생활필수품 가격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과학기술 관련 기록
황윤석은 천문학, 역상학, 수학 등 과학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이러한 내용들이 이재난고에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윤종기(輪鐘記)'에서는 자신이 관찰한 자명종을 상세히 서술하고 기어비나 작동원리를 방대한 도표로 기록했습니다. 최근 국립중앙과학관에서 홍대용의 혼천시계를 복원할 때 이재난고에 담긴 정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언어학적 기록
지명도 한자명에 한글명, 구명이 병기되어 있으며 때로는 그 이름이 유래된 전설도 적혀 있습니다. 식물, 광물, 기물 따위도 한자와 한글을 나란히 적어 두어 당시의 언어 현실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기록들은 조선 후기 국어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사회문화적 기록
이재난고에는 1768년 7월 과거시험을 본 다음 날 점심에 일행과 함께 냉면을 시켜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한국사 최초의 배달 음식에 대한 기록으로서 역사적 의미가 큽니다. 또한 충청도 진천과 경상도 상주에서 호랑이 인명피해를 막기 위해 사냥 현상금(큰놈 100냥, 중간놈 50냥, 작은놈 30냥)을 걸었고, 하룻 새 20여 마리를 잡았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재난고의 학술적 가치와 특징
이재난고는 그 엄청난 분량뿐만 아니라 실학적인 내용과 함께 한국의 저술사상 최고의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의 정치, 경제, 사회에서부터 수학, 과학, 천문, 지리, 어학, 역법 및 신문물인 서양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식을 백과전서처럼 망라하고 있어 다른 일기와 차이가 큽니다.
백과전서적 성격
황윤석의 학문적 관심 분야와 저술 분량으로 볼 때 프랑스 백과전서파의 거장 '디드로(D.Diderot)'에 견줄 만하며, 21세기에 도래할 지식 정보화 사회를 예견한 선각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학, 역상학, 역사학, 수학, 언어학, 지리학, 예술, 음악, 종교 등 다방면에 큰 업적을 남긴 조선을 대표하는 백과전서파 실학의 거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학자의 연구 노트
이재난고는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황윤석이 보고 배우며 생각한 모든 것을 매일 기록하고 그의 연구 결과까지 정리하면서 조선 후기 '과학자의 연구 노트'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정치, 경제, 과학, 역사, 사회, 문화, 언어 등 전 부문에 관심을 가지고 철저히 연구하고 대안을 제시해 모두 이재난고에 담았습니다.
이재난고의 현대적 의미와 활용
이재난고는 조선 후기 사회의 모든 분야를 다룬 종합적인 기록물로서 현재까지도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2004년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이재난고의 초서를 정서화하는 과정인 탈초화를 완료하였고, 이후 지속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연구와 번역 현황
2007년 전북대학교에 이재연구소가 설립되어 이재난고를 번역하고 있지만, 예산이 부족해 현재 속도로는 20년이 넘게 걸릴 전망입니다. 현재까지 약 10분의 1 정도만 번역 작업을 마친 상태로, 전체 번역 완료를 위한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한 실정입니다.
문화재적 가치
이재난고는 1984년 9월 20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되었으며, 2023년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부터 국가중요과학기술자료로 등록되었습니다. 고창군은 이재난고를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승격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재난고의 보존과 전승
2021년 4월, 황윤석의 8대 종손인 황병무씨가 이재난고 58책과 이재유고 목판 100점을 고창군에 기탁·기증함으로써 이 귀중한 문화유산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고창군은 이를 계기로 이재난고의 학술적 가치를 널리 알리고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고창군은 2007년 이후 매년 학술대회를 열고 번역 및 기록화 사업을 진행하며 이재난고의 학술적 가치를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또한 황윤석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고창읍에는 2025년 상반기 완공을 목표로 '황윤석 도서관' 건립이 진행 중입니다.
결론
이재난고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 황윤석이 평생에 걸쳐 남긴 한국 최대 규모의 개인 기록물로, 그 방대한 분량과 다양한 내용으로 인해 "조선시대 타임캡슐"이라 불릴 만큼 역사적 가치가 큽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언어 등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백과전서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 조선 후기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사료입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연구와 번역을 통해 이재난고의 가치가 더욱 널리 알려지고 활용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