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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려 : '한국의 슈바이처', 평생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 헌신한 위대한 의사이자 사회사업가

by jisikRecipe 2025. 9. 3.

성산 장기려(聖山 張起呂, 1911-1995)는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며 평생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 헌신한 위대한 의사이자 사회사업가다. 그는 단순한 의료인을 넘어서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고, 간장외과 분야의 선구적 업적을 이루었으며, 무소유의 완전주의 삶을 실천한 진정한 인도주의자였다. 그의 일생은 기독교적 사랑을 의료 활동을 통해 실천한 살아있는 증언이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의료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출생과 초기 교육

장기려는 1911년 10월 5일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한학자이자 독실한 기독교인인 아버지 장운섭과 어머니 최윤경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성산(聖山)이다. 아버지가 직접 설립한 의성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후, 1923년 졸업하고 개성의 감리교 계통 학교인 송도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기독교적 환경에서 성장한 장기려는 송도고보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던 중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특히 "돈이 없어서 의사의 진료를 받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의사가 되겠다"는 다짐을 하나님께 서약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그의 평생에 걸친 의료철학의 바탕이 되었다.

 

1928년 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모체인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 장기려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참고서를 살 돈조차 없어 필기한 노트만으로 공부해야 했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 학업에 임했다. 그 결과 1932년 경성의전을 수석으로 졸업하는 영예를 안았다.

백인제와의 사제 관계

졸업과 동시에 장기려는 당시 한국 외과의학의 개척자였던 백인제 교수의 제자가 되었다. 백인제는 경성의전 출신으로 조선인 의사 중 가장 뛰어난 외과의사 중 한 명이었으며, 훗날 백병원과 인제대학교를 설립한 인물이기도 했다.

 

장기려는 1932년부터 1940년까지 경성의전에서 외과 조수와 강사로 근무하며 백인제 아래에서 외과학을 익혔다. 이 시기 그는 270건의 실험을 바탕으로 "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의 세균학적 연구"라는 논문을 작성했고, 이 연구로 1940년 일본 나고야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흥미롭게도 이 시기 소설가 춘원 이광수가 척추결핵으로 경성의전 부속병원에 입원했을 때 장기려가 치료를 담당했다. 이광수는 장기려를 모델로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을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장기려 본인은 이를 부인했다.

평양 시절과 간장외과의 개척

평양연합기독교병원 시절

1940년 장기려는 평양연합기독교병원(기홀병원)의 외과 과장으로 부임했다. 백인제는 장기려가 경성의전에서 교수로 남기를 원했지만, 장기려는 가난한 환자들을 더 잘 도울 수 있는 곳으로 평양을 선택했다.

 

평양에서 그는 병원 내 다른 의사들의 텃세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수술비가 없는 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월급으로 피를 사서 무료 수술을 해주는 등 묵묵히 의사로서의 직무를 수행했다. 이는 그의 평생에 걸친 가난한 이들에 대한 헌신의 시작이었다.

한국 최초의 간암 수술 성공

1943년 장기려는 한국 최초로 간암 환자의 간암 덩어리를 간에서 떼어내는 수술에 성공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어려운 수술로 여겨지던 간암에 대한 설상절제수술을 성공시킨 것이다. 이는 한국 간장외과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해방 후 북한에서의 활동

해방 직후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진주하고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장기려에게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의 의술에 대한 헌신적 태도는 북한 정권으로부터도 인정받았다.

 

장기려는 평남제1인민병원 원장 겸 외과 과장을 거쳐 1947년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외과학 강좌장에 올랐다. 북한 정권 하에서도 그는 환자 치료에만 전념했으며, 이런 모습이 정치적 성향을 초월하여 인정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6·25 전쟁과 월남

가족과의 이별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장기려는 인생에서 가장 아픈 선택을 해야 했다. 그는 아내와 다섯 자녀 중 네 명을 북한에 두고 차남 장가용과 함께 월남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단순히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남쪽에서 더 많은 환자들을 도울 수 있다는 의료인으로서의 소명 때문이었다.

 

이후 장기려는 평생 북에 남겨둔 가족을 그리워하며 살아야 했다. 가족과의 이별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동시에 더욱 헌신적인 의료 봉사에 매진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부산 정착과 복음병원 설립

월남 후 장기려는 부산 제3육군병원에서 6개월간 근무한 후, 1951년 1월 부산 서구 암남동(현재는 영도구)에 천막을 치고 복음병원을 설립했다. 시작은 보잘것없는 천막병원이었지만, 이곳에서 그는 25년간 원장으로 재직하며 가난한 피난민들과 행려병자들을 무료로 치료했다.

 

복음병원은 단순한 의료기관이 아니라 사랑과 헌신의 실천 현장이었다. 장기려는 "병원비가 없으면 병원에서 도망가라"는 말로 유명했는데, 실제로 병원비를 낼 수 없는 환자들을 몰래 도망가게 도와주기도 했다.

학자로서의 업적과 교육자로서의 역할

간장외과 분야의 선구적 업적

장기려는 1959년 한국 최초로 간암 환자에 대한 대량 간 절제술에 성공했다. 이는 당시 국내 외과학에서 미개척 분야였던 간장외과 발전에 돌파구를 마련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1950년대 말까지 간 질환에 걸리면 사실상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는데, 장기려의 수술 성공으로 많은 간질환 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이 업적으로 그는 1961년 대한의학협회 학술상(대통령상)을 수상했다. 또한 그는 간의 혈관과 미세구조에 대한 연구를 통해 간 수술 시 출혈에 대한 공포를 없애는 데 기여했다.

 

1974년에는 한국간연구회 창립을 주도하여 초대 회장을 맡았으며, 1979년에는 20년간 한국에서 실시된 189건의 간 대량 절제 수술 사례를 수집·분석하여 간암의 부위에 따라 수술법을 달리하는 방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의료 교육자로서의 헌신

장기려는 뛰어난 임상의이자 교육자이기도 했다. 1953년부터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를 겸직하여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복음의원 진료와 대학 강의를 병행했다. 1956년에는 서울대를 사직하고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외과를 창설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는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외과 교수로 근무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부산복음간호전문대학 학장도 역임했으며, 평생에 걸쳐 수많은 의료인을 길러냈다.

 

그의 제자 중에는 한국 최초의 부검의가 된 문국진도 있다. 부검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심했던 1950년대에 장기려는 문국진이 부검의를 그만두려 할 때 "불같이 혼을 내어" 정신을 차리게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의 설립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

장기려의 가장 혁신적인 업적 중 하나는 1968년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설립이다. 정부가 국민의료보험제도를 본격적으로 실시한 것이 1977년인데, 장기려는 그보다 10년 앞서 민간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한 것이다.

 

이 조합의 탄생에는 채규철이라는 인물이 큰 역할을 했다. 채규철은 덴마크에서 유학하며 의료보험제도의 혜택을 받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장기려에게 의료보험조합 설립을 제안했다. 두 사람은 김서민, 조광제 등과 함께 구체적 작업에 착수하여 723명의 조합원으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발족시켰다.

조합의 운영 철학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진실·사랑·협동"이라는 3대 정신을 근간으로 했으며, "건강할 때 이웃을 돕고 병이 났을 때 도움을 받자"는 표어를 내세웠다. 첫 가입자는 기독교 사상가이자 민주화 운동가인 함석헌이었다.

 

조합원들은 월 보험료 60원이라는 저렴한 비용만 지불하면 되었는데, 당시 자장면 한 그릇이 50원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저렴한 수준이었다. 이는 서민들이 부담 없이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려는 장기려의 배려였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1974년 말 시점에서 총 4,648세대 19,730명의 회원을 확보하며 크게 성장했다. 1975년에는 의료보험조합 직영의 청십자의원을 개원했고, 1976년에는 한국청십자사회복지회를 설립했다.

사회봉사 활동과 인도주의 실천

장미회와 간질환자 돌봄

장기려는 간질환자들을 돌보는 데도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간질은 한때 '심령적인 질병'으로 간주되어 환자들이 사회적 편견과 배제에 노출되기 쉬웠다. 장기려는 1969년 부산에 간질환자들의 모임인 '장미회'를 설립하고 회장이 되었다.

 

그는 매월 복지관에 모인 간질 환자들을 치료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관점에서 그들의 인생 고민을 경청해주며 정신적 위로를 제공했다. 이는 단순한 의료 서비스를 넘어서는 전인격적 치료였다.

무소유의 완전주의 생활

장기려의 삶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는 완전한 무소유의 삶이었다. 그는 평생 집 한 칸 없이 살았으며, 가난한 이들의 병원비를 대신 지불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내놓았다.

 

심지어 노년에는 당뇨병에 시달리면서도 협소한 옥탑방에서 지내면서 마지막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인술을 베풀었다. 이런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것으로 여겨져 '한국의 성자'로 불리는 이유가 되었다.

부산기독의사회와 지역사회 봉사

장기려는 부산기독의사회를 조직하여 행려병자들을 찾아가 치료하는 일을 주도했다. 또한 부산 생명의 전화 설립, 장애자재활협회 부산지부 창립에도 앞장섰으며, 1985년부터 1994년까지 한국장애자재활협회 지부장으로 활동하며 장애인 복지에도 기여했다.

수상 경력과 국제적 인정

막사이사이상 수상

장기려의 인도주의적 업적은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았다. 1979년 아시아의 노벨평화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사회봉사 부문을 수상했다. 이는 필리핀의 대통령 라몬 막사이사이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상으로, 아시아 지역에서 사회봉사에 헌신한 개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상이다.

기타 주요 수상 경력

  • 1976년: 국민훈장 동백장
  • 1978년: 적십자 인도장 금상
  • 1979년: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
  • 1981년: 국제라이온스 인도상
  • 1991년: 제1회 호암상 사회봉사부문
  • 1995년: 인도주의 실천 의사상
  • 1996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추서)

2006년에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어 그의 의학적 업적과 사회적 기여가 영구히 기념되고 있다.

말년과 신앙생활

무교회주의로의 전향

장기려는 말년에 무교회주의에 심취했다. 이는 기존 교회 제도를 부정하고 개인의 직접적인 신앙을 중시하는 기독교 운동이다. 그가 다니던 부산 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 박광선은 장기려의 이런 변화가 교회에 "정신적인 영향을 미쳤다"며 목회 사역에 어려움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이는 장기려가 형식적인 종교보다는 실천적인 기독교 정신을 더 중시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평생에 걸친 가난한 이들에 대한 헌신은 바로 이런 실천적 신앙의 결과였다.

성산생명윤리연구소와 기념사업

장기려를 추앙하는 동료와 후학들이 1997년 성산장기려기념사업회를 설립하여 노숙자 무료진료와 기념강좌 등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성산생명윤리연구소가 설립되어 그의 정신을 계승하는 연구와 교육 활동을 펼치고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의 헌신

생애 마지막까지 이어진 봉사

장기려는 1976년 복음병원에서 은퇴한 후에도 청십자의원에서 진료를 계속했다. 그는 거제도 고현보건원에서도 봉사했으며, 1979년부터는 인제대학교 부산백병원 명예원장을 맡아 생애 마지막까지 의료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의 소천

장기려는 1995년 12월 25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인 성탄절에 당뇨병으로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성탄절에 세상을 떠난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평생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았던 그에게 어울리는 마지막이라는 것이다.

현재적 의미와 유산

의료윤리의 표상

장기려는 오늘날 의료인들에게 진정한 의료윤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교과서다. 의료가 점점 상업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그의 "환자 중심"의 의료철학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동창회에서는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장기려의도상"을 제정하여 매년 이웃사랑 실천과 헌신을 보여준 회원을 선정해 시상하고 있다. 이는 그의 정신이 후배 의료인들에게 계속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보장제도의 선구자

장기려가 설립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한국 사회보장제도의 원형이었다. 정부 주도의 의료보험제도가 시행되기 10년 전에 민간에서 시작된 이 제도는 "건강할 때 이웃을 돕고, 병들었을 때 도움받는다"는 상호부조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이는 오늘날 국민건강보험제도의 철학적 바탕이 되었으며, 사회적 경제의 선구적 모델이기도 했다.

결론: 영원한 스승이자 성자

장기려의 삶은 단순히 의료인의 성공담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공한다. 그는 뛰어난 의술과 학문적 업적을 남겼지만,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북에 남겨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면서도 남쪽의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그의 모습은 분단의 아픔을 승화시킨 사랑의 실천이었다. 간암 수술의 권위자였지만 평생 옥탑방에서 살며 가난한 이들을 도운 그의 삶은 진정한 위대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바보 의사"라고 불릴 정도로 순박하고 헌신적이었던 장기려지만, 그의 바보스러움은 사실 가장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었다. 그는 물질적 풍요보다는 영적 풍요를, 개인적 성공보다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선택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점점 개인주의화되고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현실에서, 장기려의 삶은 진정한 행복과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정신은 오늘도 살아있어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묻고 있다.

 

장기려, 그는 단순히 한 시대의 명의가 아니라 영원한 인류의 스승이자 성자였다. 그의 삶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은 "진정한 성공은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나누었느냐"에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