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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의 백묵원 : 진정한 모성애를 묻는 브레히트의 서사극 걸작

by jisikRecipe 2025. 9. 26.

20세기 연극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극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가 남긴 불멸의 걸작, 《코카서스의 백묵원(Der kaukasische Kreidekreis)》은 단순히 한 편의 희곡을 넘어 진정한 모성애와 인간다운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연극의 틀을 깨고 관객에게 능동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서사극의 정수를 보여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관객과 연출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작품 탄생의 역사적 배경

《코카서스의 백묵원》은 브레히트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1944년에 완성된 작품입니다. 독일의 정치적 혼란과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경험했던 브레히트는 이 작품을 통해 진정한 인간성과 모성애에 대한 자신만의 해답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작품은 1948년 미국 미네소타주 노스필드에서 초연되었으며, 브레히트의 조국 귀환 후인 1954년 베를린에서 독일 초연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작품의 영감은 중국 원나라 시대의 고전 《회란기(灰闌記)》와 구약성경의 솔로몬 재판 이야기에서 나왔습니다. 브레히트는 클라분트가 번안한 중국의 백묵원 이야기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1939년과 1940년 사이에 30년 전쟁을 다룬 단편소설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의 융합은 브레히트만의 독창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극중극 형식의 정교한 구성

《코카서스의 백묵원》은 총 6막으로 구성된 극중극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1막에서는 코카서스 지역 어느 산중 마을의 두 집단농장이 비옥한 계곡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벌이는 논쟁을 그립니다. 이는 작품 전체의 주제를 암시하는 서막 역할을 합니다.

 

2막부터는 본격적인 백묵원의 전설이 시작됩니다. 가수(내레이터)가 등장하여 계곡 소유권 분쟁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백묵원 재판의 이야기입니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총독의 아들 미첼을 두고 벌어지는 두 여인의 양육권 분쟁은 작품의 핵심을 이룹니다.

 

하녀 그루셰는 전쟁 중 총독 부인 나텔라가 버리고 간 아이를 구해 온갖 고난과 시련을 견디며 정성스럽게 키웠습니다. 반면 총독 부인은 전쟁이 끝나자 유산 상속을 위해 아이를 되찾겠다고 나섰습니다. 재판관 아츠닥은 솔로몬의 재판에서 힌트를 얻어 백묵으로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아이를 세운 후, 두 여인에게 아이의 팔을 잡아당겨 자신 쪽으로 끌어오는 사람을 진짜 어머니로 판결하겠다고 합니다.

 

이때 총독 부인은 아이를 힘껏 잡아당기지만, 그루셰는 아이가 고통받을 것을 걱정하여 아이의 손을 놓아줍니다. 이러한 행동을 통해 아츠닥은 그루셰야말로 진정한 어머니라고 판결을 내립니다. 이는 생물학적 모성보다는 진정한 사랑과 희생을 바탕으로 한 양육의 모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브레히트의 철학을 보여줍니다.

서사극 이론과 소외효과의 구현

브레히트는 《코카서스의 백묵원》을 통해 자신이 개발한 서사극 이론의 핵심인 '소외효과(Verfremdungseffekt)'를 완벽하게 구현했습니다. 서사극은 관객이 무대 위의 상황에 감정적으로 몰입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새로운 연극 형태입니다.

 

브레히트는 전통적인 연극이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몰입하게 하여 극중 사건을 단순히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들고, 현실에서의 문제나 사회적 맥락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그는 관객이 극의 사건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사회적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연극을 추구했습니다.

 

소외효과의 구체적인 기법으로는 조명을 드러나게 해 관객이 무대 위의 상황이 현실이 아닌 공연임을 인식하게 하기, 자막 사용, 배우들의 춤과 노래 활용, 프롤로그나 에필로그를 통한 직설적 메시지 전달, 플래카드와 슬라이드 등 다양한 장치 사용, 그리고 해설자를 통한 연극 내용의 구체적 설명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법들은 관객이 연극의 환상에 빠지지 않고 작품이 전달하는 사회적 메시지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듭니다.

사회적 메시지와 철학적 성찰

《코카서스의 백묵원》의 백묵원 재판은 단순한 양육권 분쟁을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브레히트는 이 작품을 통해 통념적 모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며, 선한 인간을 표상하는 그루셰의 캐릭터에는 그가 평생 존경했던 사상적 동지 로자 룩셈부르크를 투영했습니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가수는 생물학적 어머니보다는 키워준 어머니에게 손을 들어준 재판처럼, 집단농장 또한 농장의 원소유주보다는 지금까지 농장을 잘 가꾸고 지켜온 이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판결의 힌트를 제시합니다. 이는 단순한 소유권보다는 실질적인 가치 창출과 진정한 사랑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브레히트의 사회주의적 가치관을 반영합니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아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그루셰의 모습은 진정한 모성애가 혈연관계가 아닌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에서 나온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러한 주제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가족 형태와 입양, 양육의 문제에 대해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한국 무대에서의 재현과 창극 버전

《코카서스의 백묵원》은 한국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재현되었는데, 특히 국립창극단이 2015년에 선보인 창극 버전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재일교포 극작가 겸 연출가인 정의신이 연출한 이 작품은 브레히트의 원작을 한국 전통 예술인 창극으로 재해석한 독창적인 시도였습니다.

 

정의신 연출은 서막에 해당하는 원작의 1막을 과감히 제거하고, 원작의 극중극인 백묵원의 전설을 전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창극 《코카서스의 백묵원》은 성의 하녀 그루셰와 경비병 시몬의 평화로운 모습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시작하여, 전쟁으로 인한 이별과 재회, 그리고 최종적인 백묵원 재판까지 긴장감 있게 전개됩니다.

 

작곡과 작창을 맡은 김성국 작곡가는 정의신 연출과 논의하여 동서양 악기를 조화롭게 편성하고, 전통 판소리에 없는 이중창과 합창 같은 요소를 추가하여 창극에 대한 새로운 음악적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또한 관객석을 해오름극장의 넓은 무대 위에 배치하여 관객들이 극에 더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전통 판소리의 청중 참여 특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친모와 양모가 각기 낳은 정과 기른 정을 구구절절 풀어내는 소리 대결은 이 작품의 백미로 손꼽히며, 한국 관객들에게 특별한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2015년 초연 당시 개막 전 전석 매진을 기록하고 추가 공연이 오픈되는 등 큰 흥행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현대적 의미와 교육적 가치

《코카서스의 백묵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들을 던집니다. 현대 사회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입양, 이혼 후 양육권 분쟁, 대리모 문제 등은 모두 이 작품이 다루는 진정한 모성애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생물학적 연결보다는 실질적인 사랑과 희생을 통한 관계의 가치를 강조하는 브레히트의 메시지는 현대 가족 구조의 다변화 시대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또한 브레히트의 서사극 기법은 현대 연극, 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관객의 비판적 사고를 유도하고 사회적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그의 방법론은 오늘날의 문화 콘텐츠 제작자들에게도 여전히 유용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교육적 측면에서 이 작품은 학생들에게 문학과 연극을 통한 사회 비판적 사고력을 기를 수 있는 훌륭한 소재입니다. 단순한 감정적 동화를 넘어서 작품이 제기하는 사회적 문제들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브레히트 연극 이론의 현대적 계승

《코카서스의 백묵원》에 구현된 브레히트의 연극 이론은 현대 공연 예술에서도 지속적으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특히 사회 참여적 연극, 실험적 퍼포먼스, 그리고 관객 참여형 공연 등에서 그의 영향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관객을 수동적 관찰자가 아닌 능동적 참여자로 만들려는 브레히트의 시도는 현대 예술의 중요한 흐름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서사극의 특징인 막과 장의 구분을 관객에게 직접 알려주고 자막을 사용하는 기법, 그리고 비사실적인 무대 연출과 1인 다역, 노래 삽입, 관객에게 직접 전달하는 대사 등의 방식은 현대 뮤지컬과 실험 연극에서 자주 활용되고 있습니다.

작품의 문학사적 의의

《코카서스의 백묵원》은 20세기 연극사에서 "브레히트 이전과 이후"를 구분 짓는 중요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브레히트는 이 작품을 통해 연극이 단순한 오락에서 벗어나 사회 변화를 촉구하는 교육적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한국에서는 1990년 이정길에 의해 《코카시아의 백묵원》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번역되었으며, 이후 여러 번역본과 각색본이 나오면서 한국 연극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국립창극단의 창극 버전은 서구의 고전을 한국 전통 예술로 재해석하는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코카서스의 백묵원》은 단순히 한 편의 희곡을 넘어서 인간다운 삶과 진정한 사랑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담은 불멸의 걸작입니다. 브레히트가 제시한 서사극의 혁신적 기법과 깊이 있는 사회적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앞으로도 많은 관객과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작품으로 남을 것입니다. 진정한 모성애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브레히트의 질문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해볼 만한 주제임이 틀림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