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한국 근현대사의 양심, 씨알의 대변자
함석헌(咸錫憲, 1901-1989)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88년의 생애 동안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해방공간의 정치가, 분단시대의 민주화운동가, 그리고 평생에 걸친 민중사상가로 살았습니다.
특히 그가 창안한 '씨알사상'은 한국 고유의 민중철학으로 평가받으며, 2001년 세계철학자대회에서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으로 전 세계에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함석헌은 단순히 이론을 정립한 학자가 아니라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실천가였으며, 민족과 민중을 위해 평생을 바친 구도자였습니다.
1장: 평북 용천에서 시작된 파란만장한 생애
기독교 가정에서의 성장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함석헌은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당숙 함일형이 세운 한학 서당 삼천재(三遷齋)에서 한학을 수학하며 전통적 소양을 쌓았고, 이후 덕일소학교와 양시공립소학교를 거쳐 평안남도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습니다.
3·1운동 참여와 자퇴 결정
함석헌의 인생에 결정적 전환점은 1919년 18세 때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이었습니다. 평양고보 졸업반이었던 그는 만세운동에 나섰다가 학교당국으로부터 '반성문' 제출을 조건으로 복학을 허용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자퇴를 선택했습니다. 이는 젊은 함석헌이 보여준 첫 번째 저항정신의 발현이었습니다.
오산학교에서의 운명적 만남
자퇴 후 함석헌은 평안도 정주에 있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에 편입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평생의 스승들을 만나게 됩니다. 남강 이승훈과 다석 유영모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특히 유영모 선생은 함석헌의 종교관과 사상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2장: 일본 유학과 무교회주의 신앙
도쿄고등사범학교 유학
오산학교를 졸업한 함석헌은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역사교육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 그는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바로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무교회 성서연구모임에 참여한 것입니다.
김교신과의 우정
이 모임에서 함석헌은 김교신과 함께 우치무라 간조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김교신과 함석헌의 만남은 후에 『성서조선』 창간으로 이어지며, 일제강점기 기독교 사상운동의 중요한 축을 형성하게 됩니다.
무교회주의는 제도적 교회를 거부하고 순수한 신앙을 추구하는 기독교 운동으로, 함석헌의 자유로운 종교관과 비타협적 신앙태도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3장: 교육자로서의 10년, 오산학교 시절
역사교사로서의 활동
1928년 4월 귀국한 함석헌은 모교인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여 역사와 수신을 가르쳤습니다. 1928년부터 1938년까지 10년간의 오산학교 시절은 함석헌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1933년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집필했는데, 이는 후에 그의 대표작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함석헌은 역사를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뜻'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일제의 탄압과 교육현장에서의 저항
함석헌의 교육 활동은 일제의 식민교육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그는 창씨개명과 일본어 수업을 거부했고, 결국 1938년 3월 오산학교를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교육자로서 양심을 지키기 위한 그의 두 번째 저항이었습니다.
4장: 일제강점기 말기의 시련과 투옥
송산농사학원 경영
오산학교를 떠난 함석헌은 1940년 평안남도 평동군 송산리에서 김혁이 운영하는 송산농사학원을 경영했습니다. 하지만 곧 계우회사건에 연루되어 대동경찰서에서 1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습니다.
성서조선 필화사건
1942년에는 『성서조선』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1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습니다. 『성서조선』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의 종교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함석헌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대거 검거되었습니다.
함석헌은 이러한 감옥생활을 '인생대학'이라고 불렀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그의 정신력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5장: 해방공간의 혼란과 월남
북한에서의 짧은 정치활동
해방 후 함석헌은 고향에서 용암포 자치위원장, 용천군 자치위원장을 맡아 활동했습니다. 또한 평안북도 문교부장관에 추대되기도 했으나, 소련군의 점령정책과 충돌하여 소련군에 의해 수감되었습니다.
1947년 월남과 새로운 출발
결국 함석헌은 1947년 3월 월남하여 서울에 정착했습니다. 남한에 온 후 그는 YMCA에서 성서강해를 계속하며 새로운 활동 무대를 찾아나갔습니다.
6장: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 사상계 시절의 빛나는 활동
1956년, 사상계와의 만남
함석헌에게 또 다른 전환점은 1956년 장준하의 『사상계』에 참여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사상계 첫 글은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였으며, 이후 정치·사회적 문제들을 거침없이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1958년의 역사적 선언
1958년 함석헌이 『사상계』에 발표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모든 것의 밑이 뜻이요 모든 것의 끝이 뜻이다. 뜻 품으면 사람, 뜻 없으면 사람 아니. 뜻 깨달으면 얼, 못 깨달으면 흙"
이는 6·25 전쟁 이후 좌절과 절망에 빠진 민족에게 던진 각성의 메시지였습니다. 함석헌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숙제를 통일정신, 독립정신, 신앙정신으로 정리하며, 그 해결책을 '철학하는 백성, 생각하는 민족'이 되는 것이라고 제시했습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용감한 비판
이 글은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한 정면 비판이었고, 함석헌은 이로 인해 처음으로 구류 20일을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굽히지 않았고, 계속해서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를 비판했습니다.
7장: 5·16 쿠데타와 군사독재에 맞선 저항
군사정변에 대한 즉각적 반발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함석헌은 즉시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통해 군사혁명정권에 저항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는 쿠데타 세력을 정면에서 비판하며 민주주의 회복을 촉구했습니다.
1965년 '세 번째 국민에게 부르짖는 말'
1965년 함석헌이 발표한 '세 번째 국민에게 부르짖는 말'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습니다. 그는 이 글에서:
"얼굴은 사람이지만 소가지는 짐승인 놈들 일어나 당파싸움만 하며... 이름은 이 나라 사람이지만 버릇은 외국 놈의 갈보 새끼인 것들이 제멋대로 안팎을 쏘다니며 한일회담이니, 베트남 파병이니... 나라의 주권과 이익, 민족의 생명과 명예를 도미 위에 고깃덩이처럼 다 팔아먹고 있다"
고 격렬하게 비판했습니다.
8장: 『씨알의 소리』 창간과 씨알사상의 완성
1970년 독립 언론 창간
1970년 함석헌은 월간 『씨알의 소리』를 창간했습니다. 이는 그가 독립적인 언론 활동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한 것을 의미했습니다.
『씨알의 소리』는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발행한 교양 평론 잡지"였으며, 수차례 정간과 폐간, 복간을 거듭하면서도 군사독재 정권 비판의 목소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씨알사상의 핵심 개념
함석헌의 '씨알'은 민중을 지칭하는 순수 우리말로, 단순한 민중과는 구별되는 개념입니다. 그는 "'민중'이 현실태라면 '씨알'은 이상태"라고 설명했습니다.
씨알사상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 역사의 주체는 씨알(민중)이다
- 씨알은 하나님의 구체적 모습이다
- 씨알이 깨달음을 통해 변해야 역사가 발전한다
함석헌은 "하나님은 차라리 죽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민중은 절대 죽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모습이 민중이요 민중 속에 살아 있는 힘이 하나님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9장: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최전선
삼선개헌 반대투쟁
함석헌은 1971년 삼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했습니다. 박정희의 장기집권 음모에 맞서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
1974년 11월 함석헌은 윤보선, 김대중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했습니다. 이는 유신체제에 맞선 재야의 대표적 민주화 조직이었습니다.
1976년 명동 3·1사건
1976년 명동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 참석한 함석헌은 윤보선, 김대중, 정일형, 윤반웅, 문익환, 안병무, 이문영 등과 함께 구속되었습니다. 이른바 '명동 3·1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유신체제 하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10장: 비폭력 평화주의와 세계적 인정
간디에 비견되는 비폭력 정신
함석헌은 평생에 걸쳐 비폭력 평화주의를 견지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한국의 간디'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저항은 곧 나라는 존재가 스스로 나이기를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격적 자주성, 노예와 같은 인간에서 자유로운 인간으로의 도약을 위해서다"라고 말했습니다.
노벨평화상 후보 추천
함석헌의 평화사상과 민주화 공헌은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아 두 차례나 노벨평화상 후보로 선정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비폭력 평화주의가 세계적 수준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퀘이커교 가입과 말년의 평화운동
말년에 함석헌은 퀘이커교에 가입하여 평화운동에 진력했습니다. 퀘이커교는 비폭력 평화주의를 신앙의 핵심으로 하는 기독교 종파로, 함석헌의 평화사상과 잘 부합했습니다.
11장: 다종교적 포용성과 종교다원주의
기독교를 넘어선 보편종교 추구
함석헌은 평생 기독교인으로 살았지만,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보편종교를 지향했습니다. 그는 정통주의 기독교의 교리주의나 형식주의에 반대하고 노장사상, 공맹사상, 화엄사상 등에도 깊은 종교적 진리와 구원의 지혜가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은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것이었으며, 함석헌 사상의 포용성과 개방성을 보여주는 특징입니다.
동서양 사상의 창조적 통합
함석헌은 기독교, 유·불·도, 인도철학 등 다양한 사상들을 아우른 독특한 사상체계를 구축했습니다. 그는 동서양의 문명과 사상을 창조적으로 통섭하고 융합하는 삶과 정신을 평생 추구했습니다.
12장: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역사철학
한글로 쓰인 최초의 통사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한글로 쓰인 최초의 통사(通史)로 평가받습니다. 이 책에서 함석헌은 역사를 단순히 지나간 사실들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의 주체가 자신과의 살아있는 관련성을 바탕으로 사실이 가지는 '뜻'을 풀이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고난사관의 정립
함석헌은 한국사를 '고난의 역사'로 규정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이 민족이야말로 큰길가에 앉은 거지 처녀다. 수난의 여왕이다. 선물의 꽃바구니는 다 빼앗겨버리고, 분수 없는 왕후를 꿈꾼다고 비웃음을 당하고, 쓸데없는 고대에 애끓어 지친 역사다. 그래도 신랑 임금은 오고야 말 것이다"
하지만 함석헌은 이러한 고난에 좌절하지 않고 "고난에는 그 뜻이 있다"며 고난을 통해 더 큰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씨알사관의 제시
함석헌의 역사관은 '씨알사관'으로 불립니다. 이는 영웅사관이거나 유물사관이거나 유심사관이 아니고, '역사의 담지자의 주인은 씨알이다'고 보는 민중사관입니다. 그는 "진리는 민중에 있다"며 "민중이 노하지 않고 역사가 나아간 일은 한 번도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13장: 말년의 활동과 1989년 운명
1980년대 지속된 민주화투쟁
1979년 11월 24일 이른바 'YMCA 위장 결혼식 사건'에 연루된 함석헌은 1980년 1월 25일 수경사 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후에도 굴복하지 않고 1984년 민주통일국민회의 고문, 1985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고문으로 활동했습니다.
평생 현역으로 산 구도자
함석헌은 나이가 들어서도 보수화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진리와 자유를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흔히 나이가 들면 보수화되고 현실에 안주하기 쉬운 법"이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고 자부했습니다.
1989년 2월 4일 영면
1989년 2월 4일, 함석헌은 향년 8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죽음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14장: 함석헌 사상의 현재적 의미
'헬조선' 시대에 더욱 빛나는 메시지
함석헌을 50년간 연구한 김영호 교수는 "한국 사회를 '헬조선'이라 부르는 청년들을 보면서 함석헌 사상이 더욱 절실하다"고 말했습니다. 함석헌의 "갈아엎어야 한다"는 말이 지금도 절감된다는 것입니다.
한국적 사상의 세계적 가치
함석헌의 씨알사상은 "함석헌 개인의 사상이라기보다, 전형적인 '한국적 사상'으로서 드러난 것"이며, "개성적이면서도 세계적 보편성을 동시에 품은 세계사상"으로 평가받습니다.
21세기가 주목하는 통합사상
함석헌은 종교와 신앙을 원천으로 삼아 철학과 역사를 아울렀던 사상가였습니다. 그의 동서양 사상을 통합하는 시각은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더욱 주목받고 있습니다.
결론: 500년 후에나 제대로 이해될 위대한 사상가
함석헌에 대한 한 평가는 그를 "500년 후에나 제대로 이해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그의 사상이 시대를 앞서간 것이었습니다.
함석헌의 위대함은 단순히 이론을 정립한 것이 아니라 평생을 통해 그 사상을 몸소 실천한 데 있습니다. 그는 3·1운동에서 시작해 1987년 6월 항쟁까지 70년간 한국의 모든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평생 현역 투사'였습니다.
함석헌이 남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권위주의와 포퓰리즘이 횡행하는 21세기에도 시민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씨알사상은 단순한 민중주의를 넘어 개인의 깨달음과 실천을 통한 사회 변화를 추구합니다. 함석헌은 "진리는 들어서만, 깨달아서만 진리가 아니라 실현해야 비로소 진리"라고 강조했습니다.
함석헌의 비폭력 평화주의도 현재적 의미가 큽니다.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는 현실에서 대화와 설득을 통한 문제 해결을 추구한 그의 정신은 귀중한 유산입니다.
마지막으로 함석헌의 종교다원주의와 포용정신은 다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지침을 제공합니다.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가 공존하는 방법을 그는 이미 일찍이 제시했던 것입니다.
함석헌(咸錫憲, 1901-1989). 그는 20세기 한국사의 증인이자 씨알의 대변자였으며, 미래를 내다본 예언자였습니다. 그의 사상과
정신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살아있는 지혜와 영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