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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문인이자 홍길동전의 저자로 신분제 개혁과 민중사상을 주장한 혁명적 사상가

by jisikRecipe 2025. 10. 22.

조선시대 문학사에서 가장 논쟁적이면서도 혁명적인 인물을 꼽는다면 단연 허균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569년(선조 2년)에 태어나 1618년(광해군 10년)에 역모죄로 능지처참을 당한 허균은 짧은 생애 동안 문학, 사상, 정치 등 다방면에서 조선 사회에 깊은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의 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적서차별과 신분제도를 비판하고 민중봉기를 주장한 사상가이자 개혁가였습니다.

출생과 가문 배경

허균의 자는 단보(端甫)이고, 호는 교산(蛟山), 학산(鶴山), 성소(惺所), 백월거사(白月居士) 등 다양했으며, 본관은 양천(陽川)입니다. 그는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초당 허엽이었습니다. 허균의 가문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 집안으로 유명했으며, 형제들 모두가 뛰어난 문재를 자랑했습니다.

특히 그의 이복형 허성과 동복형 허봉, 그리고 누이 허난설헌은 모두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문인들이었습니다. 허난설헌은 본명이 허초희로, 27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213수의 시를 남겨 조선, 중국, 일본 삼국에서 가장 뛰어난 여성 시인으로 평가받았습니다. 허균은 후일 일찍 세상을 떠난 누이의 시를 모아 난설헌집을 편찬하여 명나라에서 출판되도록 했습니다.

학문과 초기 경력

허균은 어려서부터 비범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9세에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았습니다. 1580년(선조 13년)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는 더욱 문학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그는 학문을 서애 유성룡에게 배웠고, 시는 이달에게서 배웠습니다. 뛰어난 문장력과 말재주, 방대한 독서량과 암기력을 갖춘 허균은 명나라 사신들에게 전혀 꿀리지 않는 당대 조선의 천재였습니다.

1585년 17세의 나이에 과거시험 1차에 합격한 허균은 벼슬길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1606년에는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이때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었습니다.

파란만장한 관직 생활

허균의 관직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삼척부사가 된 지 세 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했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습니다. 이후 공주목사로 기용되었으나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낸다는 이유로 또다시 파직당했습니다. 부안으로 내려가서는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고,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깊은 교분을 나누었습니다.

1609년(광해군 1년)에는 명나라 책봉사가 왔을 때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되었고,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습니다. 1610년(광해군 2년)에는 전시(殿試)의 시험을 주관하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로 유배되었고, 그 후 몇 년간은 태인에 은거했습니다.

광해군 즉위 후에는 대북파에 가담하여 폐모론을 적극 주장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최종적으로 그의 벼슬은 좌참찬에 이르렀습니다. 허균은 명나라에도 여러 차례 다녀오며 외교 업무에도 종사했습니다.

문학 작품과 업적

허균의 가장 큰 문학적 업적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의 창작입니다. 홍길동전은 서자로 태어난 홍길동이 신분 차별로 인한 갈등을 극복하고 활빈당을 조직해 가난한 백성을 돕다가,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율도국으로 가 나라를 세워 국왕에 오른다는 내용입니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기록은 택당 이식(澤堂 李植)의 택당집 별집 권15 산록에 전하는데, 정확한 창작년도는 16세기 후반과 1618년 사이로 추정됩니다.

홍길동전은 적서 차별의 신분 제도와 사회 모순을 고발하고, 서출이라도 재능만 있으면 왕위에까지 오를 수 있다는 작품의도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허균의 사상론 중 유재론과 매우 긴밀한 연관이 있습니다. 또한 길동이 활빈당을 결성하고 반 사회적 투쟁을 통해 병판을 획득하는 과정은 허균의 호민론과 연결지어 해석할 수 있습니다.

허균은 홍길동전 외에도 한정록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다양한 전(傳) 작품을 창작했습니다. 허균이 창작한 전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신분상 보잘것없는 인물들로, 모두 세상에서 버림을 받거나 불행한 처지에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는 상상력이 아주 뛰어나서 망상이 심하고 허구의 이야기를 잘 꾸며낸다는 기록도 있었으며, 조선시대 산문 관련 교양서적들에서도 허균의 문장은 꼭 포함되었습니다.

혁명적 사상과 철학

허균의 사상은 조선시대의 기준에서 보면 매우 혁명적이고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유학 외에 불교와 도교, 심지어 천주교까지 수용하는 사상적으로 대단히 자유로운 인물이었습니다. 완고하고 형식화된 성리학에 도전하여 유(儒), 불(佛), 도(道), 무(巫)의 4교와 천주교까지 아우르는 개방적 사상을 가졌습니다.

허균의 대표적인 사상으로는 유재론과 호민론이 있습니다. 유재론은 적서차별의 부당함과 부패관료를 규탄하며, 신분이나 배경보다는 능력 있는 인재의 등용을 주장한 이론입니다. 그는 재능 있는 사람이라면 신분에 관계없이 등용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호민론은 더욱 급진적인 민중 혁명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허균은 호민론에서 천하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오직 백성일 뿐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백성을 호민, 원민, 항민의 셋으로 나누었는데, 항민은 무식하고 천하며 자신의 권리나 이익을 주장할 의식이 없는 백성을 말하며, 원민은 정치가로부터 피해를 입고 원망만 하지 스스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백성을 뜻합니다.

호민은 자신이 받는 부당한 대우와 사회 모순에 과감하게 대응하는 백성으로, 견훤이나 궁예 같은 인물을 예로 들었습니다. 허균은 호민의 주도로 원민과 항민들이 합세하여 무도한 무리들을 물리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호민론은 국왕은 백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백성의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백성의 위대한 힘을 자각시키는 혁명적인 내용이었습니다.

문학관과 표현 철학

허균의 문학적 지향은 주기론과 관련 있는 인간 감정의 자유로운 발현을 중시했습니다. 그는 문학이란 삶의 현장에서 부딪혀 생기는 체험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중요하게 받아들였고, 외부의 규범이나 이념은 작품과 무관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삶의 실상을 철저히 인식해야 할 것과 이를 사실적으로 표현해야 할 것을 강조하는 현실주의적 사고로 이어졌습니다.

허균은 현실의 삶을 피부로 느끼고 그 속에서 참다운 가치를 발견하는 것을 중시했습니다. 그는 시인으로서도 뛰어났으며, 그의 형과 누이, 그리고 스승도 모두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일찍 죽은 형과 누이를 위해 그들이 남긴 시를 모아 하곡집과 난설헌집을 편찬했습니다.

비극적인 최후

1618년(광해군 10년) 8월, 허균은 역모죄로 능지처참을 당했습니다. 허균의 죄명은 광해군을 시해하려 했다는 역모였습니다. 그의 심복 현응민이 역모를 획책했다는 것이 탄로 났고,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잣거리에서 처형당했습니다.

허균의 죄는 세상의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험하여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엄청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적법한 재판과정도 없이 일사천리로 처형되었으며, 시신도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허균이 죽은 1618년 1년 동안 185회 정도의 허균 관련 기록이 등장할 정도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었습니다.

허균의 사후 3개월 동안 허균을 따른 자들을 잡아 진상조사를 했으며, 공식적으로는 역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판결문도 없었고 피의자 신문조서도 없어, 급박하게 조사를 마무리해야 할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조선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허균은 유일하게 복권되지 못했습니다.

역사적 평가와 의의

허균은 조선시대에는 역적으로 낙인찍혔지만, 현대에 와서는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이자 행동가로 재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당시의 시대적 한계와 사상의 획일성에 반기를 들고 부패한 정치와 잘못된 제도를 실천적으로 개혁하려 했습니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며 오직 두려워할 만한 자는 백성뿐이라고 갈파하여 왕조사회를 뒤흔들었고, 바른 정치를 이끌어나갈 호민인 민중들이 힘을 보여줄 것을 권고했습니다.

그를 선구자나 선각자라고 평하기보다는 실천가요, 행동가요, 개혁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의 꿈은 평등사회, 개방사회, 국제사회를 실천하는 것이었으며, 이미 400년 전에 우리가 나아갈 민주사회의 바른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이 특히 부각됩니다. 모두가 언문이라고 천시하던 한글로 이상국가의 꿈을 그린 홍길동전을 남긴 것도 그의 진보적 사상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허균은 혼란한 시대에 잦은 국난과 외침, 파쟁에 시달리면서도 부패하여 무너져 가는 나라를 걱정하면서 새로운 이념을 제시했습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유교사회 하에서 불교와 도교, 천주교 심지어 민속종교를 넘나드는 사상의 자유로움을 지녔으며, 오도된 권위와 사회적 질곡에 맞서 개혁과 저항의 행동가로 평생을 보냈습니다. 그의 삶과 사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며,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비판적 개혁사상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