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성의 가문 배경과 가계
황희성(黃希聖, 1455-1524)은 조선 중기의 인물로 본관은 창원(昌原)입니다. 창원 황씨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인구가 많은 황씨 본관 중 하나로, 원래는 의창 황씨와 회원 황씨로 나뉘어 있었으나 1408년 태종 8년에 의창과 회원이 창원으로 합쳐지면서 창원 황씨가 되었습니다. 황희성은 이러한 명문 창원 황씨 가문의 일원으로, 특히 공희공파(恭僖公派)의 후손입니다.
황희성의 가계를 살펴보면, 그의 할아버지는 황전(黃躔)으로 봉예랑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황귀경(黃貴卿)으로 자헌대부 호조판서를 역임한 고위 관료였습니다. 황귀경은 조선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그의 손자인 황사우가 좌찬성에 오르면서 창원 황씨 가문의 위상을 더욱 높였습니다.
황희성의 장인은 진유경(秦有經)으로 예문관 제학을 지낸 인물이며, 풍기 지역의 토족인 풍기진씨 출신입니다. 이러한 혼인 관계는 후일 황희성이 풍기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황희성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황사우(黃士祐)는 좌찬성을 지냈고, 차남 황사호(黃士浩)는 풍저창 직장을, 삼남 황사걸(黃士傑)은 현감을 역임했습니다.
황희성의 관직 생활과 순릉참봉
황희성은 순릉참봉(順陵參奉)의 직책을 수행했습니다. 순릉은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의 첫 번째 부인 공혜왕후 한씨의 능으로,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참봉은 조선시대 왕릉을 관리하는 능침(陵寢) 관직 중 하나로, 정9품의 하급 관직이지만 왕실과 관련된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는 자리였습니다.
순릉참봉으로서 황희성은 왕릉의 제사와 관리, 수호 등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조선시대 왕릉 관리는 국가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로, 참봉은 능지기와 함께 능역의 전반적인 관리를 책임졌습니다. 비록 높은 관직은 아니었지만, 왕실과 직접 관련된 업무를 수행함으로써 국가에 대한 충성과 책임감을 보여주었습니다.
황희성은 자신의 관직 생활 동안 큰 업적을 남기지는 않았으나, 성실하고 온후한 성품으로 주변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그는 벼슬에 대한 욕심이 없었으며, 사람들이 벼슬을 권해도 머리를 흔들며 사양할 정도로 담백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풍기 희여골로의 이주와 정착
황희성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1492년 풍기군 희여골(현재의 영주시 순흥면 백동)로 이주한 것입니다. 이 이주는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졌는데, 황희성의 고모부인 노계조(盧繼祖)가 사직(司直)을 지내고 희여골에 살고 있었습니다. 노계조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황희성을 시양자(侍養子)로 삼아 봉양을 받기를 원했고, 이에 황희성이 가족을 이끌고 희여골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1492년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해로,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시기입니다. 황희성이 희여골로 이주할 당시 그의 장남 황사우는 7세였습니다. 이 이주는 창원 황씨 가문이 풍기 지역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4대에 걸쳐 과거에 급제하고 서울에서 벼슬을 하는 등 희여골 황가 집안이 크게 번성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풍기는 조선시대 경상북도 북부의 중요한 지역으로, 유교 문화가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황희성은 이곳에 정착하면서 지역 사회에 융화되었고, 그의 자손들은 풍기를 중심으로 학문과 관직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특히 장남 황사우가 조정에서 높은 관직을 역임하면서 희여골 창원 황씨는 명문가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황희성의 성품과 생활 방식
황희성의 성품에 대한 기록들은 그가 매우 온후하고 겸손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천성이 어질고 순근(純謹)하여 남들과 다투는 일이 없었으며, 독서를 즐기고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이러한 성품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선비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황희성은 노인을 만나면 반드시 재배(再拜)를 올렸고, 향교를 지날 때는 걸음걸이를 빨리 하여 공경의 뜻을 표했습니다. 이는 유교적 예절을 철저히 준수하는 선비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으로, 어른 공경과 학문에 대한 존중을 실천한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벼슬을 권해도 머리를 흔들며 사양했다는 기록은 그가 명예나 권력보다는 내면의 수양과 평온한 삶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황희성의 이러한 성품과 생활 방식은 그의 자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장남 황사우는 아버지의 덕을 바탕으로 학문에 정진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높은 관직에 올랐으며, 손자인 황응규와 황섬, 증손자인 황시 등도 모두 학문과 관직에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황희성의 아들 황사우와 가문의 번창
황희성의 장남 황사우(黃士祐, 1486-1536)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조선 중기의 명신으로 성장했습니다. 황사우의 자는 국보(國寶), 호는 용헌(慵軒)이며, 1507년 중종 2년에 진사가 되었고, 1514년 중종 9년에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황사우는 1520년 지평에 올랐고, 이후 문학·헌납·보덕·응교 등의 관직을 거쳐 1529년 대사간이 되었습니다. 1530년에는 좌승지를 거쳐 부제학을 지냈고, 1532년에는 한성부우윤과 대사헌의 요직을 맡았습니다. 1534년에는 형조참판을 거쳐 호조판서로 승진했으며, 1535년에는 예조판서와 우찬성에 올랐습니다. 1536년 1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3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황사우의 성공적인 관직 생활로 인해 아버지 황희성은 숭정대부 좌찬성(崇政大夫左贊成)에 증직되었습니다. 증직은 조선시대에 공신이나 고위 관료의 아버지에게 사후에 관직을 추증하는 제도로, 이는 황사우의 업적을 인정하고 가문의 명예를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좌찬성은 정1품의 고위 관직으로, 의정부의 주요 구성원이었습니다.
황사우 이외에도 황희성의 둘째 아들 황사호는 풍저창 직장을 지냈고, 셋째 아들 황사걸은 현감을 역임하는 등 세 아들 모두가 관직에 나아가 가문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이는 황희성의 교육과 가풍이 자손들에게 잘 전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황희성의 손자와 증손자들
황희성의 손자 중 특히 황응규(黃應奎, 1518-1594)와 황섬(黃暹)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황응규는 황사우의 아들로, 자는 중문(仲文), 호는 송간(松澗)이며, 이황과 주세붕의 문인입니다. 그는 154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1569년 52세의 늦은 나이에 알성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황응규는 호조·형조·공조의 정랑과 좌랑 등 여러 벼슬을 역임했으며, 1588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곡을 군량으로 바쳐 절충장군에 올랐고, 향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의병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는 초서를 잘 썼으며, 저서로 『송간고』를 남겼습니다.
황희성의 증손자 황시(黃是, 1555-1624)는 황응규의 아들로, 자는 시지(是之), 호는 부훤당(負暄堂)입니다. 그는 1579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84년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병조정랑, 지평, 응교, 시강원보덕, 사성, 청송부사 등을 역임했습니다. 1607년 판결사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10년 동안 은거하면서 광해군의 난정에 항거했습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삼척부사가 되었으나 곧 사퇴했습니다. 저서로 『조천록』과 『부훤당집』이 있습니다.
또한 황희성의 또 다른 증손자 황섬(黃暹)은 부제학을 지낸 인물로, 황시의 형입니다. 황섬은 조선 중기 학자이자 관료로서 풍기 지역에서 명성이 높았으며, 후대에 희여골 숭덕사에 배향되었습니다. 이처럼 황희성의 자손들은 4대에 걸쳐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가면서 창원 황씨 풍기 희여골 파의 기틀을 확고히 다졌습니다.
황희성과 창원 황씨 가문의 의미
황희성은 비록 높은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창원 황씨 가문이 풍기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번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1492년 풍기 희여골 이주는 단순한 거처 이동이 아니라, 새로운 지역에서 가문의 기반을 다지는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황희성의 온후하고 겸손한 성품, 유교적 예절에 대한 철저한 실천, 그리고 자손 교육에 대한 열정은 이후 세대에 걸쳐 가문의 전통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의 장남 황사우가 좌찬성에 오르고, 손자 황응규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며, 증손자 황시가 광해군의 난정에 항거한 것은 모두 황희성이 세운 가풍의 결과였습니다.
황희성이 살았던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반은 조선 사회가 유교적 질서를 공고히 하고 사림의 세력이 성장하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황희성과 같은 중소 관료층이 지방에 정착하여 학문과 덕행을 실천하는 것은 조선 사회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하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풍기와 같은 지역에서 유교 문화를 확산시키고 인재를 양성한 것은 지역 사회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황희성의 생애는 화려한 업적이나 극적인 사건보다는 평범하지만 성실한 삶, 덕행을 실천하는 삶의 가치를 보여줍니다. 그는 높은 관직을 추구하지 않았지만,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관직에 나아가고 학문에 정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는 조선시대 사대부 가문에서 중시했던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 즉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다는 가르침을 실천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황희성의 삶과 가풍은 조선시대 선비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오늘날에도 겸손과 덕행, 자손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교훈을 전해줍니다. 그가 풍기 희여골에 정착한 이후 형성된 창원 황씨 집성촌은 수백 년 동안 명문가의 전통을 이어왔으며, 이는 황희성이 세운 가문의 기틀이 얼마나 견고했는지를 증명합니다.